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속 바오로딸

[스크랩] 일은 일이고 하느님은 어디에?

by 바오로딸 2012. 2. 29.

일은 일이고 하느님은 어디에?
[생활하는 신학-이연수]
2012년 02월 28일 (화) 09:55:13 이연수 .

   
▲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 바오로딸
“왜 그토록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네가 마친 일과 계속해서 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 곧 사목 방문과 신학생과 수도자, 평신도와 젊은이 양성, 학생들을 위한 학교와 휴게실 건설, 믿지 않는 이들의 복음화 사명은 훌륭한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길 바라신다면 즉시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하느님을 믿어라!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하실 것이다. 그분은 네 일을 너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너는 하느님을 선택했지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1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그 가운데 9년은 창문도 없는 감방에 격리된 채 독방 생활을 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의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한림대 가톨릭교수협의회 옮김, 바오로딸, 2011, 64쪽)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당시 젊은 주교였던 그는 8년 동안 사목 현장에서 쌓아 올린, 하느님을 위해 시작한 수많은 사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교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상념으로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느 날 밤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온 소리로 말미암아 내면은 평화를 찾는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적 삶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는 그.

당신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요

이 책에서 반 투안 추기경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적 신앙이 전하는 희망을 줄곧 얘기한다. 그 희망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글을 보면서, 지금의 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에 희망을 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세례를 받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자기 전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싶어졌다. 책상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데, 뜬금없이 ‘당신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요,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벽에는 나의 실루엣만 촛불에 비쳐 크게 보일 뿐이다. 왜 이런 기도가 나왔지, 나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데, 하며 서둘러 기도를 끝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학부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있었을 때였다. 계속 그 전공을 살릴 계획이기도 했고.

며칠 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개신교 친구에게 이 ‘기이한’ 체험을 얘기했다. 친구 말로는, 그런 기도는 잘 나오지 않는데, 하느님이 쓰시려나 보다, 한다. 그런가, 하며 웃어 넘겼던 순간. 지금 나는 그분을 위해 일하고 있나, 아니면 그분의 일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헛갈린다.

하느님인가 하느님의 일인가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신학’이야말로 신에 관한 학문이니 하느님을 위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린 기도가 이제야 효력을 드러낸다면서 말이다. 교회 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열심히 하느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을 위해 사람들이 펼쳐 놓은 하느님의 일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교회 안에 고이 드러낼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내게 하느님을 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은 동격이었고, 따로 떼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 속에서 하느님은 자꾸 일에 치여 뒤로 젖혀지기만 한다. 하느님보다는 일이 먼저여서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을 보지 않았다. 하느님의 거룩한(?) 일을 한다며, 사람을 하나둘 내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슨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인가. 심지어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마저 잠시 다른 데 갔다 오시라며, 내몰기까지 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며 나를 한껏 드러내고 싶은 욕망 앞에서, 내 안의 하느님은 주춤하고 다른 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은 아파하시고. 에고고. 이게 무슨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하느님을 위한 일이지.

하느님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이제 당신을 제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당신의 일을 한답시고, 사람들끼리 싸우는 꼴 못 보시겠단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신을 위한 건지, 당신의 일을 위한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신과 당신의 일을 구분하는 거리두기를 하면 될까? 답을 알려 주시면 좋을 텐데 ….

이연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연구이사. 가톨릭대에 출강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9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