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지옥문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성인 지옥에 가다>, 질베르 세스브롱, 바오로딸, 2012
2012년 07월 11일 (수) 11:04:07 한상봉 기자 isu@catholicnews.co.kr

사랑이 우리를 불태우지 않았다면
예기치 않았던 산불이 우리를 태우고 갔으리

착한 열정으로 우리가 넘치지 않았다면
이름도 모르는 파도가 우리를 휩쓸고 갔으리

가난했지만 민망할 정도로 가난하여
겨울바람도 우리의 냉기를 비켜갔지만

때 묻지 않은 마음 우릴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
어지러운 바람 이 골짜기 끝없이 몰아쳤으리

도종환 시인이 지은 ‘청년’이란 시다. 시인은 민망할 정도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착한 열정을 일으켜 세우며,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 차길, 그 힘으로 파란만장한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예 몸을 다쳐 충청도 보은 산속, 해인(海印)으로 들어갔다. “해인에서 거두어 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화엄과 해인이 지척”이라고 했다(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참조). 여기서 해인이란 지혜의 바다이며, 화엄이란 실천적 삶이라 불러도 좋겠다. 해인이 성(聖)이라면, 화엄은 속(俗)이고, 해인이 종교라면 화엄은 일상이며, 해인이 하느님이라면 화엄은 그분을 드러내는 성사(聖事)다.

성인, 지옥에 가다

   

이처럼 화엄에서 해인을 보고, 해인 안에서 화엄을 만난 사제가 있다. 가난한 노동자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 안에서 ‘지옥’으로 간 사제가 있다. 질베르 세스브롱의 소설 <성인 지옥에 가다>(바오로딸, 2012)에 등장하는 피에르 신부다. 이 책은 공장 지대인 사니 마을의 노동사제가 마침내 지옥문처럼 열려 있는 탄광촌 갱도에 이르러 '고향 같은' 하느님의 땅을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세스브롱은 책을 펴내면서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어렵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중재자를 죽이는 시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지라도 찢어야 하는 시대, 예수 없는 십자가가 군림하는 이 시대에 나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고 싶지 않다”고 전했지만, 피에르 신부의 입을 빌어 한탄할 만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건져 올리고 있다. 세스브롱이 “이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결국 나이브하게 ‘복음’을 말하던 이들에게 심각한 걸림돌이 될 게 뻔한 소설이다. 그리고 고난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이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는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난 그분과 함께 있지 않아. 난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피에르.” 전임 사제로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하던 베르나르 신부가 용기를 잃고 공단을 떠나 자신이 소속되었던 수도원으로 되돌아가고, 피에르 신부가 이 마을에 파견되었다. 먼저 인근 공장에 취업해서 일하며, 퇴근 이후에 자신의 집에 모여드는 이들에게 하룻밤 지낼 숙소를 주선하고, 필요한 서류도 작성해 주고, 노동자들과 마주 앉아 조촐한 미사를 봉헌하며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눈빛을 가늠한다.

“피에르는 팔을 벌리고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손짓했다. 그가 본당에 있을 때 몇 달 동안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미사를 드렸으며, 제대에 오르는 계단과 성가대 사이에 철책이 있어 신자들과 신부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똑같이 피로를 느끼며 똑같은 요구를 가진 공장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다. 같은 손을 가진 그들, 그리스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분이 사람들 사이에 계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눈빛밖에 없었다.”

노동사제 운동의 시작, ‘미션 드 프랑스’(Mission de France)

   
▲ 쉬아르 추기경(Emmanuel Suhard)은 1941년 ‘미션 드 프랑스’(Mission de France)를 설립해 노동사제를 양성했다.

프랑스에서 노동사제운동이 시작된 것은 1941년 7월이었다. 산업사회가 낳은 비참한 노동현실 속에서 빈민층과 노동자들의 복음화를 위해 파리 대주교인 쉬아르 추기경(Emmanuel Suhard)은 ‘미션 드 프랑스’(Mission de France)를 설립했다. 비그리스도교적 환경에 복음의 누룩을 심는 선교 활동이었다. 여기에 사명감을 느끼는 사제들을 양성해서 도시빈민지역이나 공단지대에 사제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직접 공장 생활을 하며 노동자들과 삶을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사제로 대변되는 교회가 노동자들과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제들이 현장에 직접 투신한다는 의미와 그들과 나누는 우정의 중요성을 갈파하는 것이다. 시몬 베유가 <노동일기>에서 드러내고 있듯이, 직접 공장 노동에 투신해야 그들을 ‘정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해가 되어야 ‘참된 사귐이나 우정’이 가능하다. 여기서 예수회의 노동사제였던 반 브뢰크호벤 신부가 지은 <우정일기>(대구 가르멜 수녀원 옮김, 계성 출판사, 1986)의 한 대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언제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야 할지를 모색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방식이 불완전해도, 원숙하게 재검토를 못했더라도,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하여 간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이것만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요, 그들 마음을 채워주고 감동과 행복을 전해 준다. 이것은 크리스챤적인 메시지, 즉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진실은 흔히, 달갑지 않은 듯한 상황에서 더 잘 증명된다. 타인들에게로 이와 같이 가는 것이 사도직이다.”

피에르 신부가 처음 입사하던 날 만난 인사과장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자신이 선하고 하느님이 저기 편인 줄 믿고 있는 이 외로운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 사람은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의무에 충실하다고 믿고 일한다.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도록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관심사이며, 그 밖의 것은 상관이 없다. 그러나 피에르가 보기에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장에서, 환기도 되지 않는 숨막히는 창고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하루 끼니를 걱정하면서 일했지만 그들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고 있어 결코 외롭지 않았다.”

이는 단지 사니의 공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라인에서 다른 노동자를 협력자로, 동료로 만난다. 급기야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유성기업과 콜트·콜텍에서 보듯이, ‘해고’라는 같은 어려움에 처할 때, 해고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을 ‘같은 고난을 넘어가려는’ 혈육처럼 느끼며, 희망버스에서 보듯이 선한 이들의 연대를 체험한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의 세상마저 따뜻하게 품어낼 마음을 낸다.

이런 점에서 노동사제는 축복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가 사랑하던 그 ‘가난한’ 얼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형제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상징’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도 ‘상징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인간을 만나고, 시간과 돈과 몸을 내어놓고 구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더 이상 사니 마을에서 선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피에르 신부가 다시 본당으로 가지 않고 광산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당 사제들은 너무 쉽게 강론대에서 ‘사랑’을 설교하고, 이런 관념적 사랑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발생(發生)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최후 심판 이야기에서 예수가 거론한 것은 ‘구체적인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양떼' 인가 '군대'인가?

이 소설에서는 본당사제와 노동사제 사이에 빚어질 만한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날 그 지역의 본당 보좌신부인 르부아쇠르 신부가 피에르 신부를 찾아와 하소연한다. “전 본당에서 숨이 막혀요. 어린애들과 축구나 하고 부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기 위해 신부가 된 건 아닌데…….” 사제직에 대한 갈등을 빚고 있는 보좌신부 때문에 급기야 본당 신부가 본당 수녀를 대동하고 피에르 신부의 집으로 찾아왔다. ‘불안정한 사도직’으로 기울어지는 보좌신부를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본당이 시내 중심가에 사는 몇몇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빈민 지역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을 위한 본당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본당 신부는 “먼저 있는 것부터 지키고 구원하도록 해야지, 나머지는… 뒤에 해야지 한꺼번에 모든 걸 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난 이 본당의 양떼를 책임지고 있소. 그것을 지키고 하느님 앞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내 임무요.”
"그들은 양떼가 아니라 군대입니다. 제각기 방법이 다를 뿐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똑같은 직책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가 모두 ‘투사’란 말인가? 나도 알고 있소, 현대 유행어를.”
“‘구제회’라는 것이 옛날에 유행어였습니다. 그럼 아직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사도직’은 어떻습니까?”
“이 거리에서 사도직인지 뭔지는 당신 마음대로 하되 본당은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오.”
본당신부의 고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본당신부는 노동사제 베르나르 신부가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예전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마들렌이 본당을 떠난 것, 그리고 본당 보좌신부가 ‘복음적 삶’에 대한 갈증으로 방황하기 시작한 책임을 피에르와 같은 노동사제들에게 돌렸다. 피에르 신부는 답답한 교회 현실을 생각하며 “그들의 귀를 막고 있는 유리창을 깨드릴 수만 있다면! 돈, 특권, 관습, 심지어 의무라는 이름을 가진 유리창을!”이라고 읊조렸다.

피에르 신부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경찰과 노동자, 집주인과 셋방살이하는 사람들, 기업주와 날품팔이꾼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교회나 난방이 잘 된 안락한 아파트, 하늘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장이나 셋집이나 감옥에서는 동료를 배반하지 않고는 다른 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게 ‘노동자 세계’의 비극이라고 여겼다.

문득, 지난 6월 25일 명동대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행한 염수정 대주교가 강론에서 “나는 특정 계층을 위한 목자가 아니라 노인에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의 구별 없이 모든 이들이 더불어 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이런 발언 역시 안온한 교구청이나 윤택한 주교관에서나 가능한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며 슬퍼졌다. 언젠가 그도 추기경을 꿈꿀 것이다.

   
 ⓒ한상봉 기자

사제보다 아름다운 '대주교'

때로는 사제보다 아름다운 주교가 있기 마련이다. 아들보다 사랑스러운 아버지가 있기 마련이다. 사니 마을에서 동맹파업이 시작되면서 피에르 신부가 동료 노동자들과 더불어 도움을 청하러 파리의 대주교였던 추기경을 방문했다. 창백하고 마른 노인이었던 추기경에게 피에르 신부가 “죄송합니다. 피로하시다는 말씀을 듣고도…”하며 사과하자, 추기경은 “당신들은 피곤하지 않은가요?”라며 되묻는다.

추기경은 요청을 듣고서 “아버지는 특별히 한 자식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면서 “마음속으론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강한 놈들한테 항상 맞고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을 특별히 더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공평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피에르 신부에게 어떤 약속도 해주지 않았지만, 본당신부들에게 기업주들의 최근 회계장부를 수집하게 하고, 이를 회계사에 맡겨 분석한 뒤에 행동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일행이 떠나려고 하자 추기경은 “언제든지 오시오. 되도록 자주……” “혹시 내가 침대에 누운 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만나겠소.” 하였다.

다음 주일에 추기경의 명령으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파리의 성당 문 앞에서 파업한 노동자들의 가족을 위한 모금이 있었다. 추기경의 메시지는 성당에서, 사무실에서, 술집에서, 정당에서, 살롱에서 검토되었고, 어떤 이들은 “추기경이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수많은 신자들은 처음으로 “정치적 편견 없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노동자들한테서 자기의 형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파리의 많은 주민은 새옷을 입고 승용차를 몰며 기름진 얼굴을 들고 다닐 때 그들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헐벗은 외곽지대를 언짢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 가운데는 진실로 양심과 영혼의 고통을 느끼는 이가 생겨났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라고 자처할 수 없게 되었다.” 

"대주교님, 며칠 동안만 저희 사이에서 살아보시면…"

그러나 이윽고 추기경이 이승을 떠나고 새로운 교구장이 임명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새로운 대주교는 피에르 신부를 불러 제일 먼저 “몇 사람이나 세례를 주었소? 몇 사람에게 혼배성사를 주었고 미사에는 몇 명이나 모였소?”라고 물었다. 피에르 신부는 “매우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형제애가 싹트고 이해관계를 떠난 생활태도와 사랑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살고 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입니다. 대주교님, 며칠 동안만 저희 사이에서 살아보시면… 공장에서, 식당에서, 셋방에서, 회합에서… 아, 정말로 온 마을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하고 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에 살고 있는 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대주교는 “그분은 죽음까지도 순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피에르 신부, 질서문란은 위험한 함정이오. 그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니오?”라고 질책했다. 결국 피에르 신부는 사니 마을을 떠나야 했다. 후임으로 전에 본당보좌였던 르부아쇠르 신부가 노동사제로 부임한다는 전갈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혼신을 다해 일했던 사니를 떠나야 한다는 게 피에르 신부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피에르 신부는 베르나르 신부처럼 수도원으로 달아나지도, 안온한 본당사제를 택하지도 않았다. 그가 추운 겨울을 택해 힘차게 돌아서서 간 곳은 ‘지옥문’이었다. 탄광촌이었다.

지옥문에서 '다시' 만난 하느님

피에르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지옥의 영상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탄광 갱도를 바라보았다. 지옥의 문에서는 눈만 하얗게 드러난 시꺼먼 광부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자신의 상복을 입은 사람들, 그들의 발밑에 쌓인 석탄 먼지가 버석버석 소리를 냈다. 가장 불행한 이들에게로 가서 하느님을 다시 만나기로 작심한 노동사제 피에르.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반백의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무슨 용건이오?”
“일자리가 있습니까?”
“갱에 들어갈 수 있겠소?”
“네.”
“자리는 언제나 있지.”

어차피 예나 지금이나 ‘복음적 명령’을 따르는 이들은 소수다. 주교거나 사제거나 수도자거나 평신도거나 아무 상관없다. 김수환 추기경 마저 ‘복음적 청빈’을 살고자 했으나 용기가 부족했던 자신을 질책한 적이 있다. 주교들도 우리 안에 매인 양떼를 지키거나 우리 안에 더 많은 양들을 집어넣으려고 애쓸지언정, 우리 밖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감하기 쉽다. 사제들 가운데 본당 살림 먼저 챙기고서 여유가 생기면 지역사회를 돌아보리라 마음‘만’ 먹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과 ‘복음’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심하지도 않는다. 종교를 부적처럼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액땜을 하려고 봉헌금을 내고, 사제 생활을 철밥통으로 여기고, 짐짓 점잖은 체 하지만 결국 암투를 통해 주교좌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언제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던 백성을 나도 사랑한다”고 몸으로 증거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 두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눈먼 풀포기도 돌 사이에서 돋아날 것이고 슬픈 새도 우짖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 그리스도 역시 그런 슬픈 눈매를 가진 이들 가운데 한 분이셨다. 그분 역시 지옥문(화엄, 華嚴)에서 해인(海印)을 발견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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