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침묵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

몇 년 전, 책 제목에 이끌려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서는 심오한 내용에 이끌
려 다시 읽게 되었고, 기회가 되면 교우들에게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이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데는 어떤 특별한 섭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기도해도 무응
답이라 야속하기만 했던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침묵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침묵을 넘어서 성
큼 성큼 내 안으로 들어와 버리셨다.

본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불가해한 신에 대한 믿음의 보다 체계화된 극적 묘사로, 이슬람교는 알라신에 대해 99가
지 호칭기도를 드린다. 신성의 본질을 가장 참되게 잘 설명한 100번째 이름은 바로 침묵 중
에 칭송된다. 풍요롭고 많은 이름을 부른 다음, 인간은 침묵으로 하느님께 가장 큰 경배를 드
리는 것이다.

옮긴이(함세웅 신부)는 『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이라는 책 제목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번역 후기
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백 번째 이름이 ‘침묵’이라는 것을 읽게 되면서 그 어떤 감동과
함께 ‘고독과 침묵’이라는 가르멜의 깊은 영성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계시지만 침묵을 넘어서 계신다는 생각에 이르러 책의 이름을 정했다고 밝힌다.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다양하게 전
해지는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느낌은 각별했다. 그동안 교회는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고 아직도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유일신론이 있고, 남성 우
월주의 내지는 힘의 논리가 은연중에 배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기도 중에 부
르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유비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하느님은
당연히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삼위일체의 하느님’하면 씁쓸하
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이 하나 있다.

전교를 목적으로 나온 모 개신교 사람들과 삼위일체 교리에 관하여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내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알고는 성경 어디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있느냐고 집요하게 다
그쳤다. 당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확신도 지식도 부족했던 나로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당혹스럽다 못해 치욕스럽기까지 했었다. 이 책을 통해 덤으로 얻은 수확이 있다면 삼위일체 교
리를 개신교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생겼다.

그동안 하느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고착화되고 고정된 틀에 박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성
모 마리아와 성령의 역할에 관해서도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다. 이 각성이 신앙의 새로운 불길
로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
은 하면서 막상 현실에서는 잘 반영되지 않고 있다. 왜일까? 이제부터라도 마음의 눈을 크게 뜨
고 다양한 이름의 하느님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을 부르는 데 여성이면 어떻고 남
성이면 어떠한가? 세상의 온갖 다른 것으로, 천 가지 만 가지로 이름을 바꾸어 부를지라도 하느
님은 다만 하느님 자체이시다. 우리의 주변을 감싸는 침묵과 그 침묵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께 감
사하며 책 소개를 마친다.

지영(테오도라·시인)

마산주보 문화란

원문 보기: http://www.cathms.or.kr/mboard.asp?Action=view&strBoardID=jubo&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name|s_subject|&strSearchWord=&intSeq=17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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