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빛으로 저희를 이끄시는 주님,

저희보다 먼저 주님을 곁으로 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비오니

지상에서 겪은 고통과 아픔을 벗어버리고

평온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쁨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가 나누었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저희도 언젠가 지상에서 마지막 길을 달려

천상에서 마중 나온 그와 더불어 행복해지리다.

그때까지 주님의 그늘 아래 행복하시길

저희가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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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독후감]

「주름을 지우지 마라」를 읽고

모든 것이 축복이며 사랑해야 할 것들

 

발행일 : <가톨릭신문> 2014-03-16 [제2886호, 16면]

 

사람 없이 이 세상이 지금처럼 형성될 수 없었듯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에게 있어 늙고 죽는다는 것이 어찌 보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견해는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 분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물론 나이와 신앙의 깊이가 정비례하진 않지만, 오랜 세월 살아오며 겪고 듣고 느끼며 축적한 내면적 깊이는 젊은이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소중한 재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죽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임을 깨닫고 그로 인해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죽음 역시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잠시 내가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는 늘 젊음과 늙음, 어른과 아이가 만나고 공존하고 있었다. 생과 사가 만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축복이며 우리가 사랑해야할 것들이다. 늙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신비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으로 만들면 인생이 아름답다고, 인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쳤을 때, 그 근본과 진리를 잃지 않는다면 저자의 바람처럼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를 하며 편안하게 주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광환(제노)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60190&ACID=71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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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8) 엔딩노트 

죽음, 하느님께로 가는 아름다운 길

엔딩노트(Ending Note, 2011) , 감독 : 스나다 마미(砂田麻美), 상영시간 : 90분 , 장르 : 다큐멘터리 , 등급 : 전체 관람가 



인간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일회적 삶을 사는 인간에게 죽음은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삶이 의미가 있다면 죽음 또한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나다 도모아키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엔딩노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을 통해 말기암 판정을 받아든다. 예상치 못한 죽음 통보 앞에 망연자실해 하며 슬퍼하기보다 그는 성실하고도 꼼꼼하게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준비한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은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여행 가기' 등 목록을 작성하며 그는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는다. 그렇게 '엔딩노트'가 채워질수록 가족과의 긴 이별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 말기암 판정을 받고 나서도 해변가에서 손녀들과 머슴놀이 실컷 해주는 주인공 스나다 도모아키.


▲ 하느님을 믿기 위해 사제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다고 고백하는 스나다 도모아키(왼쪽).


▲ 임종 직전, 주인공 스나다 도모아키는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 막내딸에게 세례받는 주인공.


죽음 준비는 내 일상의 일부


 영화의 첫 장면은 카메라 파인더를 서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며 촬영하는 패닝(panning)기법으로 막을 올린다. 청명한 하늘에 정갈히 건축된 높은 빌딩을 낮은 데서 올려다보며 찍다가 장례식장인 성당으로 화면을 옮겨가며 오버랩(Overlap)한다.

 그는 죽어서도 문상객을 자상히 챙긴다. "바쁘신 와중에도 저를 위해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실 건 충분한가요? 부족한 건 뭐든 말씀하세요.… 덕분에 이날을 맞을 수 있게 됐습니다."

 대학에서 경제학부를 나와 민간 화학제조사 영업부에서 40년간 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해온 그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마지막 프로젝트"라며 엔딩노트를 만든다.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무엇이든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꼼꼼한 그였기에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잘 죽을 수 있을까, 사람은 왜 죽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죽음을 적극적으로,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하나하나 준비해 나간다. 장례식장도 자신이 직접 답사해 빈틈없이 준비한 그는 94세 어머니께 알려드린다. "장례식은 조용하고 간단히 할 거예요. 노래도 부를 거예요. 지인들만 모시고, 부의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밝은 성격과 심각한 일일수록 유머를 잊지 않았던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몸은 야위지만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지도 않으며 분노하지도 않고 오히려 유쾌하게 죽음을 맞는다.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을 미리 컴퓨터에 정리해 두고 혹시나 해서 여벌받기까지 해 둔 명단을 아들에게 넘겨주며 말한다. "장례식에서 주빈(Main guest)은 나니까." "…장례식 도중에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전화해"하며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올해를 넘길지 모르니 연하장하고 부고장을 같이 보내겠다며 친구에게 전화한다. 


 잊고 있던 중요한 것들을 회복하기


 자신의 부주의로 태어난 막내딸! 그러나 문제인 이 딸을 통해 그동안 무심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직접 사제를 찾아가 말한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을 찾다 보니 이렇게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서 편안히 보내주신다면…." 그러고나서 사제가 권하는 기도문을 매일 정성들여 바친다.

 "제가 세상을 뜰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가장 걸리는 건 가족이죠!" 그는 소홀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힘들지만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멀리서 홀로 살았던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중에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것. 그리고 불교 신도인 그가 세례를 받기로 한 사실과 성당에서 장례식을 할 것이라는 소식 등이다. 바쁜 직장생활로 평소 소원했던 아내에게도 쑥스럽지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내 준코는 "같이 가고 싶어.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줄 너무 늦게 알았어.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부인에게 "같이 살아줘 고맙다"고 자신의 노트에 기록한다.

 가족들 역시 끝까지 온 힘을 다하는 그가 흔들리지 않고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최선을 다한다. 모두 그의 둘레에 모여 행복한 옛 추억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되살린다. 아버지 주위에 모인 가족들! 손녀들은 "할아버지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하늘나라에 가시게 됐지만 할아버지랑 굉장히 즐거웠어요.…"하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 그는 어머니께도 작별 인사를 한다. "오랫동안 고마웠어요.… 어머니보다 먼저 가서 죄송해요.…"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쁨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관계가 있는 한 죽음은 끝이 아니다. 

 평소 스쳐 지나치던 일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매시간이 소중하며 은총이었다. 방학 중 미국에서 찾아온 손녀들 앞에서 암에 걸렸다고 누워만 있을 순 없다며 손녀들 머슴노릇으로 재미있게 최선을 다해 놀아준다. 임종을 앞둔 그을 위해 미국에서 자신을 보러 찾아온 손녀들에게 애정을 표시하며 연신 "고맙다…. 감격스럽다! 할아버지 감격!! 만나서 감격!!"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기쁨을 표현한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모든 것이 감사로울 뿐이어서 그는 끊임없이 그와 관계한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는 죽기 하루 전 세례를 받는다. 그가 상상했던 장엄한 성당도, 오르간 음악도 없는 병실에서 막내딸에게 세례(대세)를 받는다. 온 가족이 모인 병실! 부인과 세 자녀, 큰 아들의 세 아이까지! 창가에 비치는 햇살 속에서 죽음에 대한 어린 손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웃고 있으니까 여기가 천국 같다. 정말 그러네"하고 말한다.

 이어 그는 편안하게 죽음의 문을 넘어 영원한 나라로 간다. 죽음은 축복이자 은총이다.

 그리고서 어둑어둑해지는 도시 하늘에 한 마리 새가 하늘로 훨훨 날아 사라진다. 장례차가 가족 곁을 지날 때 그는 손녀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 정말 행복하단다. 하늘의 별이 돼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영화에 대해서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는 감독이자 주인공 막내딸인 스나다 마미 감독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직접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를 공부한 그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밑에서 배운 이후 데뷔작에서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 준비, 임종을 그렸다. '엔딩노트'는 최대한 인물에 가깝게 다가가면서도 거리를 두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모습을 습관처럼 계속 카메라에 담아온 스나다 마미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었지만 촬영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음을 맞던 모습과 죽음을 함께 마주하는 가족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고자 영화화를 했다고 밝힌다. 죽음은 관계의 회복이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며, 하느님께 가는 아름다운 길임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룹대화  

 1. 인생을 마무리하는 주인공 죽음에 대해 느끼는 바는 무엇인가?

 2. 주인공의 마지막 프로젝트, 엔딩노트는 무엇인가?

 3. 나의 엔딩노트에 첫 번째는 무엇인가?


 성경구절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끝이 좋고 죽음의 날에 복을 받으리라"(집회 1,13).




이복순 수녀(성 바오로딸 수도회)

평화신문 [가톨릭 문화산책]<38>: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80592&path=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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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10>가장 큰 사람(마르 9,33-37)

스스로 낮추고 섬기는 위대한 삶

▲ 영화 '마르첼리노의 기적' 포스터.


예수님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코 복음 9장에는 제자들의 무능력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음에도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에 너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하면서 수난과 죽음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마음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게 십자가와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따라다니는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오면 예수님 옆에는 누가 앉을까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과 생각이 너무 달랐다. 그 제자들 모습이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신앙생할을 열심히 하면서도 예수님 생각 따로, 우리 생각 따로인 것처럼 행동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수난을 당하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 길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제자들의 알아듣지 못함이 내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보자. 세속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현세적 축복을 기대하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아무리 당신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셔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은 당신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원하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두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통치자가 되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기들은 마땅히 그 다음가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34)

 그러나 제자들은 거리낌이 있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설명해주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다. 삶을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나눔의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신 다음, 어린이를 껴안으면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어린이들은 서슴없이 예수님에게 간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께 곧장 갈 수 있는 마음은 우리 안에도 있다. 많은 사람이 통상적으로 천진무구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가장 미소한 이의 상징이 어린이라고 말씀하신다. 

 영화 '마르첼리노의 기적'을 보면, 주인공 마르첼리노가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다. 수사들은 마르첼리노를 데려다 키웠다. 수사들은 마르첼리노에게 다락방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마르첼리노는 다락방에 올라간다. 다락방에 올라가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고 마르첼리노는 놀란다. 옷을 걸치고 있지 않은 예수님에게 마르첼리노는 "예수님 춥죠? 예수님 배고프죠?"하고 묻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어 마르첼리노가 가지고 온 빵을 같이 잡수신다. 우리 마음에도 분명히 예수님을 직면할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 눈에서 의심 없이 순수한 믿음을 보셨다. 어린이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고 살 때 누구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고, 하느님의 종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대답해주셨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진정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ㆍ오후 1시 40분, 금 오후 8시, 토 오후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ine. or.kr, 02-944-0945 


평화신문 : 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73170&path=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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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job coaching 2013.09.20 18:37 신고

    행복 경제학은 공공 정책의 성공을 평가할 때 공공 행복의 조치가 전통적인 경제 조치를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어야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감사합니다.

영화 '터치'- 생명을 살아가는 작은 숨결들

흔들리는 인간 마음을 터치하는 '그 손길'

터치(Touch, 2012) ,감독 : 민병훈 ,상영시간 : 100분 ,장르 : 드라마 ,등급 : 18세 이상 



몇 년째 자살률이 부동의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2011년 서울시에서 자살한 사람은 2722명으로, 하루 평균 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3시간마다 1명이 자살한 셈이다. 너무 빈번해 이제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면 보도도 되지 않는다. 민병훈(바오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그날그날 세상을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낮고 작은 숨결이 모여 이룬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이런 메시지를 살리려고 애쓴, 소시민의 이야기 같은 영화 '터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국가대표 사격 선수를 지냈지만 점차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모든 걸 잃고 중학교 사격코치를 하는 남편 동식(유준상)과 간병인 일을 하며 쪼들리는 삶이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는 아내 수원(김지영)의 이야기다. 수원은 병원 몰래 돈을 받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들을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도 한다. 어느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동식은 코치 재계약 문제로 이사장이 주는 술을 어쩔 수 없이 마시고 음주 운전을 하다가 자신이 가르치던 사격부 학생 채빈을 치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뺑소니를 쳤다가 경찰에게 잡힌다. 동식의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은 자신이 돌보는 노인환자의 끈질긴 성관계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돼 수원은 결국 병원에서 퇴출당한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수원은 딸 주미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고 수소문 끝에 낯선 집에서 주미를 발견하는데….


▲ 사슴을 죽인 동식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오열한다.



▲ 무릎 끓은 동식을 창 밖으로 보며 수원은 따스한 미소를 보낸다.


▲ 가톨릭노인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수원이 깨끗이 치유된 여인의 손을 잡아준다.


민초들의 삶

 영화의 첫 장면은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만신창이가 돼 흔들리는 들풀로 시작한다. 세파에 시달리며 가정을 지키는 소시민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장례미사를 드리는 성당 안 풍경이다. 검정색 포에 덮인 관, 아빠 품에 안긴 어린이의 해맑은 미소가 스쳐 가지만 수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사제는 강론을 계속한다. "…하지만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영혼 속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눈은 좀 더 밝아질 것입니다. 영혼 속 신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는다면…." 강론은 영화의 흐름을 암시한다.

 장례미사 도중 돌아가신 할머니의 아들이 성당 밖으로 나와 고통스러워한다. 수원이 말을 건넨다. "어머님은 좋은 데로 가셨을 거예요." 그러나 아들의 질문은 날이 서 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때 뭔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사랑과 용기의 영이 그녀를 터치한 것이다.

 수원은 몰려오는 피곤을 감수하며 간병 일에 힘을 소진한다. 먹고 살기 위해 불법 의료행위까지 하며 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수원은 자신에게 불신의 눈길을 던지는 사제나 수녀의 눈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그녀의 긴장된 삶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핸드 헬드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며 따라가는데, 이들 장면 속에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이웃을 괴롭혀 상처를 주지 못하는 수원의 착한 심성과 강인함의 양면성을 겹쳐서 보여준다. 그녀는 간신히 남편을 출옥시킨 뒤 노인 복지센터를 그만둔다.

 동식이 사격코치를 하던 부유한 집안 여학생 채빈은 자신의 속옷을 훔쳐 달아나는 남학생(장정원)을 사격용 총으로 쏜다. 정원이는 폐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달동네 학생이다. 동식은 정원이를 쏜 채빈의 뺨을 때리며 야단친다. "빈총이라도 사람에겐 겨누지 않는다." 

 수원의 노력으로 출옥한 동식은 사냥 포수로 돈벌이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사슴을 보며 생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동식은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체험을 사슴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느님 영에 터치된다. 인간의 쓰러짐은 인간적인 것이고, 다시 일어섬은 신적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찾아온 희망

 주미의 행방불명을 알게 된 수원은 절규하며 딸을 찾아 나선다. 그때 딸의 생일선물 인형을 매달고 가는 남학생을 미행한다. 학생이 다다른 가난한 달동네 정원이의 집 벽장에서 주미를 발견한 수원은 두려움과 분노 속에 도망치듯 딸을 끌고 나온다. 그때 방바닥에서 방치된 한 여인을 본다. 더러운 오물 냄새 속에 다리가 썩어가는 여인의 꺼져가는 신음 소리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그때 성당 마당에서 본 사슴이 떠오른다. 수원은 자신의 마음을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간다.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어두운 방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은 수원과 그녀를 비춘다. 어쩌면 우리 영혼 속에 깃들고 싶어 하는 하느님 빛의 초대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현실

 죽음이 임박한 듯한 여인을 위해 수원은 주민센터도 찾아가고 병원 응급실도 찾아가지만 관료적인 그들의 태도는 답답하기만 하다. 수원은 소리친다. "그럼, 돈 없으면 치료도 받지 말라는 건가요?" 이 말은 사회에 던지는 절규다. 마지막으로 가톨릭노인복지센터에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그러나 그동안 수원이 저지른 거짓에 속아온 사제는 그 여인의 입원을 거절한다. 수원은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직접 여인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아주려 하지만 두려움이 엄습한다. 절망의 순간에 양심을 건드리는 하느님! 수원은 자신이 생명도, 죽음도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한다. 이때 죽음에 임박한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수원의 볼을 조용히 건드린다. 그를 위해 애쓰는 수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터치다. 그때 요양원 구급차가 도착한다.

 요양원에 도착한 여인은 세례를 상징하는 물속에 잠긴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씻긴 것이다. 수원은 그의 손을 잡아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여인은 아들 정원을 보살펴줄 것을 수원에게 부탁한다. 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은은한 성가를 뒤로한 채 수원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밤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

 한편 동식은 채빈의 사격 성공에 환성을 지르며 또 술을 마신다. 취중에 교통사고로 쓰러진 아이를 총으로 쏜 동식은 갓길에 쓰러진다. 아침 햇살이 동식이의 어깨를 환히 비춘다. 잠을 깬 동식은 몽롱한 눈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에게 생명의 경외감을 안겨준 사슴이다. 햇살은 동식의 눈과 사슴의 눈을 강하게 비춘다. 동식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오열한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수원을 밝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추고 수원 손에 들려진 생일 선물 인형이 클로즈업된다. 그때 원장신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잘 들어갔니? 방금 자매님이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안나야, 고생했다. 정말 수고했다. 편히 쉬거라." 수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불편함을 주는 영화 

 러시아에서 영화 공부를 한 민병훈 감독의 작품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연출기법처럼 담백하고 함축적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하고, 곱씹으면서 깊은 의미를 끌어내게 한다. 영화 '터치'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영화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어둔 현실의 갖가지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영화이기에 재미로 감상하기에는 무겁고 감상하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성찰적 예술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룹대화  

 1. 오늘을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은 무엇인가?

 2. 이 영화에서 터치 받은 것은 무엇인가?

 3.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터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성경구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이복순 수녀 (성바오로딸수도회)


평화신문 <가톨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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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 - 죽음 / 전봉순 지음

발행일 : 2013-04-14 [제2841호, 17면]

전봉순 지음/200쪽/9000원/바오로딸  

신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주제별로 다룬 바오로딸의 기획 시리즈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의 네 번째 주제는 ‘죽음’이다.

이 책에서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죽음과 관련된 부분을 요약해 설명하고,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살펴본다. 성경을 통한 죽음 이해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이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일깨운다.

저자는 “성경의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성찰해봄으로써 날마다 삶 안에서 그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54849&ACID=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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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 4 죽음

발행일ㅣ2013.2.5  지은이ㅣ전봉순 판형ㅣ128*188
쪽수ㅣ200쪽  가격ㅣ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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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습니다.

첫 장부터 의미 심장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죽음'은 부정적인 단어 입니다. 헤어짐, 이별, 끝이라는 의미와 상통하기도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슬퍼하고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말할까 4 죽음」은 성경 속에서 언급했던 죽음에 관한 말을 해석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 하느님이 인간에게 죽음을 준 이유, 부활의 의미, 일상 생활에서 죽음이 갖고 있는 의미를 성경을 통해 이해해 보고 있습니다.

 

여는 글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본문 중 여는 글-

우리는 중병이 들거나,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친구나 가까이 지내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준비된 마음으로 장수를 누리다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도 사고, 자연재해, 돌연사 등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죽음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조금 더 일찍 떠나고 조금 더 머물다 떠난다는 것 뿐 죽는 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 「죽음」은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셨는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을 암시했던 구절을 예로 들어 ‘죽음’을 심도 있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찾아내 '하느님께 내어드림', '운명을 받아드리는 법'을 쓰고 있습니다.

- 본문 중, 여는 글-

성경의 사람들은 죽음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도 죽음을 멀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않았다. 예수님도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 26,38)라고 하시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고, 결국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하느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무력함을 느끼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또한 책 곳곳에는 '죽음이 두려운 이유', '죽음은 죄의 결과 인가?', '사후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본문 중, 죽음은 죄의 결과 인가?-

창세기 1-3장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류가 번성하도록 강복하셨다....인간의 죄와 벌 이야기(창세 3,1-24)를 통해 사도 바오로는 첫 인간의 불순종을 일컬어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라고 말한다....

만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ㄳ이며 실제로 하느님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17)라는 말씀은 인간이 금지된 열매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살 수 있었으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야하는 직접적 원인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다. 죽음이죄의 결과라면 인간은 엄청난 죄책감과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것이고 어떤 희망도 없을 것이다. 죄 때문에 하느님의 벌을 받아 죽는다면 나약한 인간은 하는ㅁ의 자비를 찾을 길이 없다.그러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기에 죄를 범한 인간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해 변명할 기회마저 주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제대로 맞는 방법, 죽음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나열 합니다.

 

 

-본문 중, 죽음의 열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하날 그댈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식물이 열매를 맺으려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더위와 모진 비바람을 견뎌야 하듯 우리도 일상에서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죽음의 열매는 용서, 섬김, 너그러움, 포기, 희생, 봉사 등이다. 이런 열매들은 실천을 요구하며 죽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죽음으로써 끝이 아닌,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던 예수님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기에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우리가 그리던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게 되기에 죽음을 잔인하다고 한다. 우리는 철저히 혼자 죽어가야 하기에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지만 동시에 사랑했던 사람을 다음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염원도 있다. 그래서 죽음이 그리 고독하거나 외롭거나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암 수술을 받은 어느 노 사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했을 때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예수님 뿐 아니라 먼저 간 부모 형제 친구 교우 동료 사제들을 만나리라는 생각에 죽음이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하늘나라에 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곳에 가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먼저 간 이들을 무끄럼 없이 떳떳하게 만나기 위해 삶을 더 헌신적이고 단정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이 책은 성경을 통한 죽음 이해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 믿음으로

죽음이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성경공부를 시작한 신자들이나 신앙 안에서 삶의 일부분인 죽음에 대해 고민하과 하는 분들에게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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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 .  1. 15.   l  지은이:  신은근  l  판형: 128*188
쪽수: 196쪽  l  값: 6,000원  

  기획 의도

 사순시기 동안 날마다 복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과 부활이 오늘 나의 삶에 던져주는 실천적인 의미를 다양한 예화를 통해 깨닫도록 초대한다.

  주제 분류 : 영성, 묵상  
 
 키워드(주제어) - 사순절, 복음, 수난, 죽음, 부활, 십자가, 재의 예식, 성주간, 만남, 은총, 신비, 신앙, 기적, 유혹, 베드로와 유다.
                        
  요약 : 예화로 읽는 사순시기 복음묵상집 !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대축일까지의 매일 복음 묵상이다.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 가족의 일상,그리고 직장과 성당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우화 또는 옛날이야기 등이 복음과 어우러져 깊은 맛을 더해 준다.

상세 내용

재의 수요일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까지의 매일 복음 묵상이다. 
2008년부터 3년간 매일미사 해설로 사랑받았던 신은근 신부가 다양한 예화를 들어 묵상을 이끌어 준다.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 가족의 일상, 그리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성당에서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 우화 또는 옛날이야기 등이 복음과 어우러져 깊은 맛을 더해 준다. 구체적인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이 주님과 만나는 기적임을 비춰준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며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는 것. 살다 보면 누구나 힘겨운 일을 만나게 된다는 것, ‘감당하기 힘든 고통’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를 져야만 은총이 함께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매일의 묵상 시작 부분에 그날의 주제가 되는 복음 말씀 한 구절을 소개하여 말씀을 외우거나 품고 다니는 데 도움이 된다. 매일의 묵상 마침 부분에는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기록하는 란이 있어 사순시기 동안 소지하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볼 수 있도록 했다.

  대상 


 모든 신자, 사목자,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사순시기 여정을 의미 있게 걷고자 하는 이.


 지은이  신은근 신부


1979년 사제수품(마산교구), 2012년 현재 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신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매일미사」의 복음묵상 집필.
평화방송 텔레비전 <영성의 향기Ⅱ> 강의.
저서「말씀으로 걷는 하룻길」(성바오로), 강론음반 <신앙의 열 가지 열쇠>(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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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희망함으로, 지금 여기에 깨어 있기
[서평] 안셀름 그륀 신부의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바오로딸, 2011)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우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살아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인생사에 집착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들에 대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릇 생명이란 유한성의 세계에서 더 찬란한 그것이며 생명가진 것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즉 죽음에 대해 깨어있고자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죽음의 때를 알 수는 없을지라도 생이 끝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하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죽음을 자아의 완전한 소멸이나 삶의 몰락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관문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천국, 연옥, 지옥 등의 표상과 연결시키고 이를 통한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부활을 말해왔다.

성경과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융의 분석 심리학을 연구한 안셀름 그륀 신부는 그의 책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바오로딸, 2011)에서 이런 표상들의 의미를 해석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답한다. 저자가 ‘삶과 죽음의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심리학적, 철학적, 성서적 견해를 살피고 희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길로 인도하는 일종의 ‘죽음 묵상집’이다.

그륀 신부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융의 진술을 소개하며 인간 영혼 깊은 곳에는 영원한 삶에 대한 예감이 있다고 말한다.

“융에 따르면 인생의 중반기부터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생생하게 살아간다. 죽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사상은 현세의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는 성공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것에 더욱 활짝 마음을 열게 된다.”

심판과 연옥, 그리고 지옥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정렬된다는 희망

그륀 신부는 또한 여러 가지 신학적 개념은 궁극적으로 사실이기보다는 하나의 표상에 가까우며 신학은 우리가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는 표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체험과 그 표상이 지금 여기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륀 신부는 심판, 연옥, 지옥, 천국에 대해 신학적 대답을 시도한다. 그는 심판의 본질적 의도는 공포나 불안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 삶에대한 철저함을 가져야한다는 경고라고 말한다. 동시에 심판은 인간이 지상에서 겪는 모든 불의가 조정되리라는 희망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구원의 희망이다. 그는 연옥 또한 장소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지칭하는 표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철저히 자신의 밑바닥을 만나기에 “사랑은 정화와 교정의 고통 없이는 몰두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연옥 또한 우리 실존이 하느님을 향해 개방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자비로운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고통이 연옥이라는 것이다.

심판과 연옥이 모두 하느님을 향해 정렬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즉, 잘못하고 연약한 모습을 지닌 우리가 누구인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정렬되는 것이 심판과 연옥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과 연옥은 ‘형벌이 아닌 은총’이다.

지옥도 이런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옥의 형상은 인간이 자신을 폐쇄시켜 죽음 뒤에 뒤늦게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며 그런 닫힌 마음이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은 인간이 하느님께 마음을 닫는데서 생긴다. 지옥에 대해 경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패할 수 있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륀 신부는 심판과 연옥, 지옥에 대한 형상을 설명하면서 간혹 신앙인들에게 보이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동기들이 이에 연결되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했다. 누군가가 심판을 받거나 지옥에 가기를 바라게 될 때, 거기에는 타인을 향한 보복감정, 예수를 따라 사는데 대한 욕구불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심판과 지옥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한다.

천국은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된 상태

그는 또한 요제프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해석을 통해 천국이 ‘인간 존재가 하느님과 맞닿은 상태’라 정의한다. 다만 충만한 사랑인 천국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받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맞닿음, 혹은 일치는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천국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합일된 천국의 순간에도 ‘자아’그리고 ‘독립된 인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바다에서 사라지는 하나의 물방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해석의 바탕에는 몸이 깊은 체험을 기억하는 곳간과 같다는 심리학적 인식체계가 깔려있다.

“많은 사람이 천국을 마치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통합되어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있을 수 없고 인격도 찾아볼 수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다르게 생각한다. 인격은 육신으로 표현된다. 모든 인간은 일회적이며 유일한 존재이며 죽음으로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과 화해하지만 자신의 인격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일회적 모습을 본래대로 순수하게 간직할 것이다.”

한편 그는 신학자 오트마르 푹스의 해석을 통해 성인들의 전구는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하는 기도’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청할 때 성인들이 스스로 이전의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이들과의 일치와 연대 속에서 기도는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죽은 이들한테도 적용된다. 즉, 지상에서 가졌던 것보다 더 큰 마음을 지니며 하느님과 화해한 죽은 이들은 천국에서도 우리 삶의 여정에 동행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간혹 죽은 이들과 화해하지 못한 상태로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런 죽은 이들과의 연대는 또 다른 화해를 불러일으키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 또한 인간 삶의 일부이며 뿌리
죽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는 이런 해석에 이어 결국 죽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그륀 신부는 과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 수고의 보상을 받기 위해 이 지상을 되도록 빨리 떠나고 싶은 눈물의 골짜기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언제나 두 개의 차원임을 강조한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희망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과의 친교에 대한 희망이다. 이런 두 개의 희망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은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기다릴 수 있고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성하리라 희망하며 살아간다. 희망은 또한 짐을 덜어준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실현하지 않아도 된다. 죽음을 거쳐 가더라도 여전히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게 하거나 되도록 많은 업적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단번에 끝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인내하는 기다림은 현재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도록 이끈다. 희망은 지금 이 순간을 도피하도록 종용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고치거나 미래를 완전하게 가꾸지 않아도 된다. 희망은 우리를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도록 이끈다.”

희망 속에서 죽는가, 절망 속에서 죽는가, 확신을 지니고 기대 가운데 죽는가, 불안과 근심을 지니고 죽는가는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있다.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정답은 있을 수 없을지라도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은 결국 삶을 인식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적 표상은 인간이 하느님께 똑바로 정렬되는 상태로 죽음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리라는 희망을 말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빛을 희망하는 것, 죽음이 소멸이 아닌 삶의 완성이라는 인식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어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필리 1, 21-2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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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 베르나르딘 지음, 강우식 옮김, 『평화의 선물』, 바오로딸, 2012


그 날 신부님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셨다. 나도 한참이나  ‘뭐지? 사랑인가? 기쁨인가?’라며 머릿속을 헤매고 다녔다. 정답은 그날 복음에 있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렇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평화이다. 부활하시어 당신이 누리고 계신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그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고 실제로 만날 수 있다. 그 평화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 선물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맛보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부활은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부활한 후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한 가지씩 근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하루도 빠짐없이 어려움과 고통을 만난다. 충분히 감당할 것이 있는가 하면 때론 그 무게에 짓눌리기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회피하고 싶고 때론 회피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셉 베르나르딘 추기경님에 관한 얘기이다. 추기경님은 1996년 11월 1일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이 책은 돌아가시기 전 3년의 과정을 담고 있다. 돌아가시기 13일 전에 이 책을 마무리하셨다. 표지와 서명은 그분이 마지막 손길로 쓰신 것이다. 

추기경님은 췌장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교회를 미워하고 그래서 자신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사람에게 성 추행범이라는 고소를 당한다.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인단과 주변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준비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화 안에서 자신의 진실함으로 사건과 세상을 대면하고 해결하신다. 

그 사건이 해결되고 안정을 찾고 교회를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췌장암 진단을 받는다. 암이라는 자신의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목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추기경님은 모든 계획을 뒤로하고 병원에서 그리고 환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공개하신다. 

고통과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신 추기경님의 모습은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신앙의 해를 맞으며 베르나르딘 추기경님의 삶이 담긴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며 믿음을 키워나가기를 기도한다. 


- 황현아 클라우디아 수녀

* 광주교구 간행물 <하늘지기>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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