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
시기심은 이 명령과 정반대인 줄 알면서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기쁨을 외면했고
상대의 행복을 샘하고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도 작고 보잘것없어
더욱 당신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당신의 빛으로 채워주십시오.
저에게 당신 사랑을 부어주시어
시기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배려와 사랑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처럼 모든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하고 청하는
성숙한 저희가 되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사랑 가득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_ 「까칠한 윤리 숨통 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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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것을 엄숙히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법이
구체적이지 못하여 죄를 지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당신의 뜻이 뚜렷하지 않아 그 뜻을 벗어났다고 변명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고 허물을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이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간, 저희가 그동안 해온 시시한 변명과
치사한 핑계를 말끔히 털어내도록 도와주소서.
저희 영을 깨끗이 하시어
저희의 행위가 진리이신 당신께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선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_ 「까칠한 윤리 숨통 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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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고백합니다.
말로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면서
진심으로 말씀이신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의 복음을 좋다 하면서
당신게서 선물하신 참 행복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뜻과 다르게 깊이 병들어 있는 세상이 그 증거입니다.
저희가 세상을 탓하고
힘든 상황을 탓하고
피곤한 몸을 탓하고
분주한 일상을 핑계대며 사랑을 나누지 않은 결과입니다.
주님, 세상 아픔에 귀 기울이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세상의 신음소리가 저희 모자람을 지적하는 호소임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께서 주신 힘을 카인처럼
죄와 타협하는 데 사용하지 않게 지켜주소서.
주님만이 행복의 근원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저희가 되기를 소원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_ 「까칠한 윤리 숨통 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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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미완의 문자’를 완성해 주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진짜 가족을 탄생시킵니다.
_ 장재봉, 「까칠한 윤리 숨통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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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은 

아내와 아이들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저녁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귀한 아버지의 몫은 있을 수 없습니다.

_장재봉, 「까칠한 윤리 숨통 트다」

[방주의 창] 페어플레이가 그리운 세상 / 민남현 수녀

발행일 : 2012-05-13 [제2795호, 23면]

인생의 축소판인 운동경기

운동감각이 둔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은 걷기다. 그럼에도 운동경기를 보는 것은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즐겨본다. 운동경기는 인생의 축소판 같아 선수들의 몸놀림과 경기 운영방식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스포츠든 패하기 위해 하는 경기는 없기에 승부욕은 매우 중요하다. 승부욕은 집념과 도전정신에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승부욕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신사도다. 최선을 다해 싸우면서도 깔끔하게 규칙을 지키는 모습은 감동 자체로 새겨진다. 좋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정당한 대결이다. 운동경기가 정정당당하고 개운하게 마무리되었을 때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다. 인생 여정이 성공과 실패의 높낮이로 이루어지듯이 운동경기 또한 이기고 지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이다.

나는 스포츠를 삶과 분리된 놀이로 보지 않는다. 어느 선수가 운동실력 이외에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칭찬 받으면 그 자체로 반갑고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인생은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하며 직접 행동으로 가르쳐 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의 사설

얼마 전에 이런 생각과 다른 신문 사설을 보았다. 논문 표절 문제에 휩싸인 한 금메달리스트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그는 학자가 아니라 ‘체육인’임을 감안해서 보아달라는 관대한 충고(?)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각 사람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부터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고작 거짓으로 꾸민 하루살이의 찬란함일까? 객관성 없는 동정론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수에 대면하는 자세

물론 인간은 실수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다. 그런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실수한 후에 이를 대면하는 자세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이를 후회하는 마음이 있을 때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다시 살아난다.

때로 치명적인 잘못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설사 사과와 용서가 말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눈빛이나 태도에서 그 마음이 읽혀질 때 많은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일어난 사태의 경우, 사건 당사자의 태도에서 이러한 페어플레이를 볼 수 없다는 씁쓸함이 마음의 골을 깊게 한다. 운동경기와 삶의 페어플레이가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현실을 가늠하게 하는 반응들

이 사건에 대한 몇몇 반응들 또한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을 가늠하게 하는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국익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이 비리를 폭로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 제기다. 몇 년 전, 국제 과학 잡지에 실린 한국 논문조작 사건이 크게 요동을 칠 때도 일부에서는 국익을 위해 이 일을 덮어주는 것이 애국주의적 행위라는 이상한 논리를 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덮어주는 것이 나라의 이익에 정말 도움이 될까? 또한 거짓의 생명이 영원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에 우리의 치부가 알려지면 부끄럽기 때문에 마치 없는 척 감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국수주의적 발상이며 열등의식의 표현으로 보일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논문표절 대상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 대자보의 내용이다. 그 글에 드러난 심각한 도덕성 부재는 정신세계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제보자를 처벌하라’는 제목 아래 ‘진상을 규명하고 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A씨를 색출해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이 벽보가 등장한 시점이 논문표절심사 결과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님을 믿고 싶는 마음에서 나온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표절 수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된 상태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낙관론을 전재로 한 이런 요청은 현실적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생들의 얼룩진 생각

나에게 특히 심각하게 다가온 사실은 이 표현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이다. 논문표절 자체는 문제시하지 않고 이를 드러낸 것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맑은 지성을 갖추어야 할 대학생들의 생각이 많이 얼룩졌다는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더욱 아프다. 어둠은 결코 어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아프고 부끄러워도 밝게 드러내고 사죄할 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


민남현 수녀(엠마·성바오로딸수도회)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44001&S=바오로딸

 


하느님 얼굴을 보는 기쁨

하느님은 어디 계실까라는 질문 앞에 서면 나는 미소부터 나온다. 그리고 나의 공동체 수녀님들을 떠올린다. 방문을 열고 구두를 신으려는데 흙 묻은 내 구두를 누군가 몰래 가져가서 광나게 닦아놓거나 다림질을 하려고 걸어둔 옷이 어느새 다림질되어 기다리고 있다거나. 수도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마치 사랑의 경쟁을 하러 온 사람들 사이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행은 가능한 한 모르게 할 때 가장 재미가 나는 것이라는 고수(?) 수녀님들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모르게 그 대열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이렇게 내 삶 안에 내 동료 수녀님들 안에 살아 계신다. 그리고 매일매일 나에게 손을 내미신다. 때로는 멍해지는 강한 충고로, 때로는 어릴 적 산타할아버지처럼 뜻밖의 사랑의 선물로 늘 신선한 충격을 주시며 내게 오신다.

나의 상처와 아픔에 내 손을 붙잡아 주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동료 수녀님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송용민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앙 감각’(세상 속 신앙 읽기, 10쪽)이 아닐까?

“믿는다는 것은 나한테 익숙한 삶에 변화를 촉구하는 힘든 도전일 수 있지만,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아름다운 체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제3의 눈’을 갖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 보지 못했던, 때로는 나이가 들어서 가려졌거나 스스로 보고 싶지 않아 감아버린 눈을 다시 뜨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심어주신 신앙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도 진주를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는 영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다.”(같은 책, 9-10쪽)

돌아보면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 같다. 그러나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마치 사랑으로 가득 찬 것 같다. 내가 살아 있고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니. 그리고 힘에 겨운 내 곁의 사람을 붙들어 주며 힘이 되어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는 눈 말이다.

질곡처럼 느껴지는 세상 속에서 실타래같이 엉켜 무디어진 신앙 감각을 따뜻한 주님의 마음으로 되찾아 주는 듯한 송용민 신부님의 책을 손에 쥐고 나는 말없이 웃었다. 하느님의 얼굴을 또 보게 된 것이다.

- 주민학 벨라뎃다 수녀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삶과 신앙'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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