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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바오로딸

나자렛 예수 - 서평

by 바오로딸 2015. 7. 31.

『나자렛 예수』

교황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 1-2, 바오로딸, 2007. 2012.


박종구 S.J.(사제, 예수회)

서강대학교, 교의신학




                                       사진 1)『나자렛 예수』1, 2, 유년기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본인이 로마로 불림을 받고 일하기 전에 촉망 받던 젊은 신학자(독일)였다. 이 책은 저자의 말마따나 ‘오랜 여정을 거쳐 준비’한 글이며(I권, 8쪽)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2004년에 시작하여 교황이 된(2005년 4월) 후에 첫 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전권이 출판되었다(『나자렛 예수, 전 2권). 사실 교황직에 있으면서 수많은 글을 읽고 자신만의 독법을 가지고 그리스도론에 해당하는 책을 집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본인은 그리스도론을 저술한 게 아니고,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면서 이 책이 다른 전통적 그리스도론 책들과의 의도적 차별을 시도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리하여 첫 권이 출간(2007년)되고 나서 두 번째 권이 나오기(2011년)까지 4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우리말로 나온 것은 2012년이니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독자에게는 통째로 읽을 수 있는 행운이 되었다.



사진 1)『나자렛 예수』1, 2, 유년기 - 저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제프 라칭거)


『나자렛 예수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방법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논의를 시작한다. 저자는 역사비평이 기여한 성경 연구와 그리스도론 이해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18세기 이후 이 백여 년 간 신학은 성경 연구의 결과에 많은 부분 기대어 발전해 왔다. 특별히 통칭하여 역사비평방법은 성경 연구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최근까지 발전적으로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역사비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역사비평이 몰고 온 성경 연구의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 19세기까지 진행된 예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방향에 오류가 있다는 판단도 일부 있었다. 그렇다고 성경 연구의 결과에 오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연구 결과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새롭게 갱신해 나가면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할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역사비평은 복음서의 성격을 밝혀내는 기여를 통하여 예수의 역사적 모습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자는 역사비평을 그리스도교 구조상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방법론적 연구라고 천명한다. 신학과 신앙의 내적인 본질이 역사학적 방법을 요청하며 성경의 연구와 주석 작업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선언이기도 하지만 복음서와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편집되고 토대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비평의 방법론이 참으로 유효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성경 연구에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하나, 역사비평이 신앙의 고백 차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말할 수 없다. 둘, 첫 번째 조건을 설명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역사성 자체가 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역사가 자기의 의무에 충실하게 과거를 탐구하려고 한다면, 역사의 과거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신앙은 적어도 과거의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늘 현재화하는 활동에 기반하고 있다. 사건의 이해를 과거에 고정시키려는 역사비평연구의 움직임과 현재에서 의미를 찾는 신앙은 때로 상충할 수 있다. 과거의 사건과 말씀에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역사비평은 신앙과 달리 자기 한계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비평 방법을 뛰어넘는 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저자는『나자렛 예수를 집필하면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20세기 후반에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출발한 ‘정경적 주석방법(Canonical Exegesis)’을 소개한다. 연구의 의도는 역사비평이 결여하고 있는 바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 안에서 (부분적인) 본문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추천한다. 성경 읽기의 이 방법은 성경이 저술된 정신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소박한 견해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오래된 교부들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12항 참조)이 제언한 바도 있다. ‘정경적 주석방법’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전체 내용과 통일성이 성경 이해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통일성, 이 점은 성경을 끊임없이 ‘새롭게’ 읽는 과정에서 말씀의 전승이 문서화 과정으로 이행되었다는 현대 주석학의 연구에서 기인한다. 읽고 또 읽는, 그래서 새롭게 읽는 동안에 반복되는 독서 과정에서 ‘새롭게’ 이해한 내용과 지향이 문서화되고, 마침내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이 짝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그리스도론을 저술하는 책들이라면 먼저 성경의 내용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앙고백의 차원이 요청된다. 즉 역사비평이 담을 수 없는 결단이 필요하며, 역사 이성이 투과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정경적 주석방법’은 성경의 개별 본문을 전체 내용 안에서 관련성을 찾으며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역사비평과 모순되지도 않지만, 본격적 의미에서 신학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다. 역사비평이 역사적 단계에서 지닌 의미를 추구한다면, 신앙의 언어로 고백된 기록(성경)은 미래를 생각하는 개방성에 정향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앙은 최초의 발설 단계부터 공동체를 배경으로 전개되며, 미래는 더욱 큰 역사적 공동체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역사비평이 고정된 과거를 지향하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숨 쉬는 자들의 공동체의 역사를 지향한다. 역사비평이 전개되는 곳에서 연구방법론의 한계를 의식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저자는 미래를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을 언급한다. 성경의 저자는 어느 특별한 인물을 가리키지 않으며, 하느님 백성인 공동체를 저자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의 인도로 하느님 백성 안에서 살아 존재하는 말씀이 된다.


                                                 사진3)『나자렛 예수』1


저자에 의하면,『나자렛 예수를 집필하게 된 커다란 이유가 바로 하느님, 곧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나자렛 예수가,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전제와 다르게, 역사적 예수를 소개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에는 공동체적 신앙을 전제하는 조건이 따르며, 신앙 안에서 역사비평은 아주 효과적인 성경의 독법이 된다. 저자는『나자렛 예수를 집필하며 앞에서 간단히 서술한 역사비평의 한계를 넘어서 그리스도론적 통찰을 추구한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저자는 역사비평이 기여하는 바는 정경적 성경 주석방법 안에서 신앙을 전제로 적용된다면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방법적 중요성의 의의를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전통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론을 저술하는 것이『나자렛 예수의 목표가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그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예수의 모습과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다. 사실 그리스도론이 신학이란 틀에서 학문적 제시를 시도한다면, 근본적인 의미에서『나자렛 예수가 시도하는 지향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 비록 겉모습이나 내용의 전개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독자의 오독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고백 신앙의 구도에서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모두이니까 독자가『나자렛 예수의 의도를 저자와 동감하기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저자는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역사비평이 제공한 연구를 섭렵하면서 통관한다. 그에게 구약성경을 통관하는 주제가 하느님과 일치라면, 신약성경은 초점을 달리하며 주제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모세의 출현으로 이스라엘 신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면,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모세에 대해 가지는 예언자의 모습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예언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의 인물을 특별한 존재로 묘사해 준다. 구약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받았다면, 새로운 모세는 다른 차원의 계약의 중개자로 이해된다(히브 9,11-24 참조). 이처럼 모세에 집중된 구약의 시선은 신약성경에서 전통으로 이어졌고, 새 시대엔 종말론적 인물, 곧 새 모세를 기다리게 되었다. 당대에 신약성경의 공동체는 새 모세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했고, 계시의 전달자, 계약의 중개자를 넘어 계시 자체요 계약의 성취로 신앙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요한 1,18(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을 이해하며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났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얼굴을 마주보면서 하느님의 품안에 계신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아들의 일치 차원에서 예수의 기도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요한 14,9의 주장처럼 예수를 보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보는 것일까? 예수의 탄생이나 세례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반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마태오 복음), 혹은 더 넓게 전 인류의 구원이란 맥락 안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루카 복음서). 복음서의 상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의 존재를 이해하는 차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에 따라 관심의 영역뿐만 아니라, 말하고 싶은 바도 달라진다. 요한복음서의 용어로 말하면, 세상에 속한 이들의 언어와 진리에 속한 이들의 관심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굳이 이 두 영역이 항상 서로 배치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세상과 진리를 구분하는 요한복음서에서 요한 14,9의 선언은 세상의 방식이 쉽게 응답할 수 없는 신앙 고백의 차원을 주장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믿음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의 언행은 모두가 일상적이거나 허무맹랑한 것이 될 수 있으며, 혹은 속임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비평이)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되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 현실이 되고 그분의 현실이 하느님의 현실이 되어 온다. 공관복음서가 사실의 묘사에서 신앙의 묘사로 시선을 옮겨간다면,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의 신앙을 더 깊은 시선으로 가기 위해 상징과 은유를 반복한다. 특별히 요한복음서 전체는 신앙의 상징으로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구약의 신앙 표현을 신약의 신앙 고백으로 전환한다.


저자는 예수의 세례와 유혹사화, 하느님 나라의 복음, 수난과 부활 이야기 등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의 메시지와 모습을 신학적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인류를 향한 예수의 보편적 사명과 죄의 극복을 위한 언행을 상징과 은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세례 이야기와 유혹사화는 철저히 구약성경의 배경과 당대의 현실을 날줄과 씨줄로 삼아 엮어낸 사례이다. 저자의 관심에서 예수의 역사성이 우선적 요소는 아니지만, 그는 철저히 역사적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역사성이 더해진 신앙의 초월성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전제해야만 가능한 논의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설교와 주의 기도에 대한 비교적 긴 해석(I, 4장과 5장)은 저자가 교회의 삶과 교회 안에서 지켜온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어온 자취를 풍부하게 드러낸다.


                                         사진 4)『나자렛 예수』2


『나자렛 예수는 2권에서 복음서의 궁극적 관심사인 수난과 부활을 주제로 통째로 다룬다. 말하자면 복음서가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진행해 온 것처럼 저자도 수난과 부활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온 힘을 기울인다. 예루살렘 입성을 기점으로 수난의 시작을 알리며, 수난과 부활의 틀 안에서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들과 발 씻김, 대사제의 기도(요한 17장)들을 다룬다.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니에서 보인 번민의 시간 등도 수난과 부활의 경계에서 의미를 드러낸다. 아마도 이들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은 역사적 예수를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지 않았겠는가? 복음서의 백미는 복음서사가들의 지향처럼 수난과 부활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더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성의 의미를 제쳐 놓고서는 그리스도 사건을 언급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도 역사적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래된 전통의 신앙은 표현은 달라도 적어도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데 소홀함이 없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건으로써 부활의 의미가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예수의 삶이 초월적 존재로서 드러남이기도 하고, 동시에 역사적 사건을 선언하는 이중성을 내포하는 까닭이다.

근대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진행되어온 역사적 예수의 해석은 현대에도 진행 중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근대주의와 신앙은 충분치는 않아도 깊은 대화를 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신은 왜 우리가 지금 그들의 증언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작은 무리의 제자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까?’(II, 343쪽) 저자는 우리의 신앙이 자주 미혹에 빠지는 현상을 질문으로 내보이며, 이것이 전체 성경이 듣는 우리의 질문임을 요약해 준다.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게 마련이지만, 대답에 동의를 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시는 하느님의 신비는 역사비평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자유를 주고 사랑을 선사하며’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방식이 하느님의 방식이리라. 믿음으로 얻는 기쁨은 제자들이 어디서든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세상의 ‘지속적인 관계’(II, 362쪽)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진 5)『나자렛 예수』유년기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면, 책의 성격이다. 저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나자렛 예수가 그리스도론을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예수의 모습과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론을 논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저자의 주장처럼 본격적인 논증과 토론을 강조하지 않지만, 저자의 지성적 삶을 배경으로 한 신앙을 전제로 예수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자렛 예수』는 이런 점에서 메마른 신학서적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영성적 성격을 다분히 드러내는 맛이 있다. 두 권의 분량이 조금 크다고 여겨지지만, 내용을 생각하면 부족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두 권의『나자렛 예수에 더하여『나자렛 예수: 유년기(바오로딸, 2013)도 일독을 권한다.



* 서평 출처 : 박종구, 「서평-나자렛 예수」, 『신학과 철학』 26(2015), 225-230.

* 사진 제공 :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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