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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바오로딸

[스크랩] 사제들은 자신을 '마리아의 종'으로 봉헌했다

by 바오로딸 2012. 2. 10.

사제들은 자신을 ‘마리아의 종’으로 봉헌했다
[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여성과 그리스도교 3>,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11
2012년 02월 09일 (목) 15:07:32 한상봉 기자 isu@catholicnews.co.kr

메리 말로운(Mary T. Malone)의 <여성과 그리스도교> 제3권이 바오로딸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역사를 발굴해 냈다는 점에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신원회복’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출판된 3권은 종교개혁부터 21세기까지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근대에 들어서 가톨릭교회가 성모발현과 성모신심에 대한 교의적 선언을 통해 마리아시대를 열어간 것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마리아신심은 교회 안에서 '원없이 잉태하신 마리아'와 '성모승천' 교의와 관련해 '믿을 교리'로서 진보적 신학계에선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으며, 특히 성모신심을 둘러싼 그릇된 신앙과 사적계시 문제로 한국교회마저 소란에 휩싸이고 있는 상황이다. 띠라서 2006년에는 한국 주교회의 교리신앙위원회에서 <올바른 성모신심>이란 책자가지 발간했다. 

프랑스혁명으로 더욱 촉발된 교황권주의와 신심운동

   
메리 말로운은 “성모 마리아를 여성적 삶의 가장 완벽한 전형으로 드높인 1850년부터 1950까지 한 세기를 ‘마리아시대’라고 이름 지었다. 그 고비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귀족적인 위엄있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절대군주들과 맺었던 동맹이 다소 삐그덕거리기는 하였지만 가톨릭국가에서 교회는 교육과 환자치료를 독점하고,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어떤 통치자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귀족정치아래서 주교들은 ‘성사집행보다 교구를 다스리는데 더 치중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교구민과 시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57개 교구가 압박을 받았으며, 교황은 대주교 정도로 강등되고, 모든 사제는 시민법을 존중한다는 선서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다시 상황을 바꿔놓았다. 오히려 그 후로는 교황권 제한주의에서 교황권 지상주의로 돌아가고, 인간의 타락이야말로 참된 현실이며 오랜 통제수단이 더 안전하다는 보수적 견해가 힘을 받고,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서 일어난 마리아 발현은 가톨릭교회를 새로운 열정으로 채웠다.

로마는 많은 이를 계몽주의가 낳은 의심의 고통에서 구해주었고, 모두가 안심하고 안길 요새를 제공하는 듯 했다. 또한 로마는 서둘러 요새를 떠나려는 자들에게 ‘지옥의 두려움’이라는 오래된 위협을 다시 가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 100년간 교황권은 대중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점점 더 많은 성인(聖人)들을 공급하고, 새로운 신심형태를 만들어갔다.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 티 없으신 성모성심과 거룩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 특히 감실 안에 계신 성체께 대한 신심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고 교황은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연장선에서 교황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교의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가톨릭신자들은 교황이 ‘지상의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조건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갔다.

1854년에는 성모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1862년과 1865년에는 몇 천 명의 주교와 사제와 평신도들이 로마에 모여 대규모 축제를 벌였다. 1864년에는 근대세계에 반대하는 교황선언인 <오류목록>(Syllabus of Errors)을 반포했다. 이것은 철학, 과학, 문학, 신학 분야에서 이룩한 대부분의 진보를 단죄한 80개의 명제로 구성된 문서다. 범신론에서 성경 연구모임까지, 시민학교에서 교회일치운동까지, 표현의 자유에서 여러 다른 종교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단죄했다. 이 문서는 교황좌만이 거룩한 것을 선언할 독점권을 지녔으며, 교황은 진보의 흐름에 발맞춰야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리아시대, 은총의 통로가 된 성모

   

말로운은 가톨릭교회가 여성해방운동에 맞서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마리아’가 유효하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19세기 가톨릭교회는 여성해방운동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으며,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회칙 <불멸의 하느님>(Immortale Dei))을 반포하면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해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구절을 상기시켰다.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여성을 공장에서 중노동 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은 집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톨릭여성을 복종시키는데 효과적인 처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야말로 가장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은총에 다가가는 ‘통로’로 여겼다.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께로’(ad jesum per Mariam)은 수많은 신자가 선택한 기도의 길이었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인 까닭에 ‘공동구속자’로 공경 받았다. 천사가 예수의 탄생 예고 때 말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루카 1,28)라는 구절을 두고, 마리아가 은총을 선물로 받았으므로 은총을 나누어주는 지위를 얻었다고 믿었다. 아울러 ‘미리암’이라는 성경의 젊은 유다여성 마리아는 잊혀버렸다.

이 당시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주석을 통해 ‘은총이 가득한 이여’를 뜻하는 케카리토메네(kecharitomene)는 마리아가 그녀 이전의 다른 많은 인물들처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일 뿐이라고 밝혔으나, 오히려 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 호교론적이고 승리주의적인 마리아신심이 늘어났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공격 앞에 마리아의 명예를 방어했으며, 여러 마리아 신심단체를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명칭은 하나같이 군대식이었다. 푸른군대, 무염시태 국민군, 레지오 마리애(‘마리아의 군단’이라는 뜻)가 그것이다. 특별한 축일에 묵주기도로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풍습이 생겨났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축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성모마리아, 사제를 유혹하지 않는 여성이며, 위로를 주는 중개자

   
▲ 루르드의 성모 발현.

프랑스 마리아론자인 베륄, 올리에, 외드는 각자 고유한 마리아론을 주장했는데, “사제는 마리아와 혼인해야 하고 성모성심을 예수성심과 똑같이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많은 사제들이 자신을 ‘마리아의 종’으로 봉헌했다. 18세기 중엽 알폰소 데리구오리는 <마리아의 영광>을 출판해 “마리아는 밟아 누르는 여 지배자”이며 “모든 은총은 그분을 거쳐 나온다”고 주장했다.

1846년에 비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뒤로 잇달아 마리아발현이 일어나면서, 이런 분위기가 열광적이 되었다. 첫 번째 발현은 1830년 파리에서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서 일어났다. 가타리나 수녀는 환시를 열망하며 수도회 창립자인 빈첸시오 드폴의 유물인 리넨천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어느 날 수도원 성당에 비단옷을 입고 하얀 베일을 쓰고 발아래 초록과 노란색이 섞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밝은 빛이 가타리나 수녀를 향해 흘러나왔는데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지하는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 여인은 가타리나에게 ‘메달’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그 이듬해 이 메달이 온 세계에 퍼져나갔다. 한편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했다. 직후인 1858년에는 루르드에서 시골소녀인 벨라뎃다에게 마리아가 발현해 자신을 ‘원죄 없으신 잉태’라고 소개했다.

1879년에는 아일랜드 노크에서 또 다른 성모발현이 발생해 이 지역에 국제공항이 생길 정도로 순례자가 붐볐다. 마지막 발현은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나타났는데, 이곳은 교황한테만 전하라는 비밀 메시지 때문에 유명해졌다. 훗날이 이러한 발현들은 메주고리예 발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성모발현은 아니지만 나주 성모 등 마리아를 둘러싼 기적 시비와 사적 계시 문제로 진통을 앓고 있다.

말로운은 1950년 12월 8일에 있었던 성모승천 교의 선포로 마리아 찬양시대가 막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 성모승천 교의를 두고 심층심리학자인 칼 융은 ‘여성성의 신격화’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마리아시대는 지배하는 남성과 특유하게 영광을 입은 여성이라는 매우 다른 두 인간성의 이분법이 승리한 때이며, “마리아는 성과 상관없는, 육체에서 이탈한 순수함을 지닌 채, 여성들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사실 사제와 일반 신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이러한 마리아 이미지가 필요했다. 사제는 안전하고 완벽하게 순수한 여성의 이미지로 마리아가 필요했는데, 이 이미지는 사제직무를 수행하면서 만나는 유혹적일 수 있는 여성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일반 신자들은 자신의 곤경을 이해해 주며, 접근할 수 없고 두려움을 안겨주는 남성 신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게 해주는 ‘둘째 신성’으로서 여성 이미지가 필요했다. 여기서 나오는 게 ‘중재자인 마리아’다. 이처럼 마리아 이미지는 아름답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심할 바가 없으나, 마리아를 역사적 진공상태로 존재하게 만들어 실제 마리아의 삶은 성모발현 이야기보다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이 없이 교회유지도 어렵지만, 여성은 '영원한 조력자요 보조자'

   
한편 아일랜드의 마리아신심은 여성들에게 쌍날칼로 작용했다. 성모신심과 관련된 행렬과 순례, 9일기도, 5월과 10월의 신심행사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찬란한 빛깔과 흥분,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행사들은 쌓여 있는 집안일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마리아신심은 다른 한편 교회가 특정한 어머니상을 고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어머니는 성과 무관한 피조물로 여겨지고, 가정에 머물며 자녀들의 종교의식을 책임져야 마땅했다. 여성은 고통을 참는 능력인 인내, 침묵, 눈에 보이지 않는 투쟁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상적 모방자로 마리아처럼 추앙되었으며, 이런 생각은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오늘날 남자들이 교회를 포기하고 정치권력과 경제적 성공에 매달리는 사회에서 여성은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여성은 성경을 공부하고 육아와 선교를 수행하며, 수많은 자모회와 선교회, 본당에서 활동하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을 기부해 왔다. 이처럼 교회에서 여성들이 없으면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나, 여성에 대한 교회의 갖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기 생활과 교회 안에서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영원한 조력자요 눈에 안 띄는 보조자로 머물 때 마리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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