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들은 자신을 ‘마리아의 종’으로 봉헌했다 | ||||||||||||||||||||||||
[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여성과 그리스도교 3>,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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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말로운(Mary T. Malone)의 <여성과 그리스도교> 제3권이 바오로딸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역사를 발굴해 냈다는 점에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신원회복’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마리아신심은 교회 안에서 '원없이 잉태하신 마리아'와 '성모승천' 교의와 관련해 '믿을 교리'로서 진보적 신학계에선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으며, 특히 성모신심을 둘러싼 그릇된 신앙과 사적계시 문제로 한국교회마저 소란에 휩싸이고 있는 상황이다. 띠라서 2006년에는 한국 주교회의 교리신앙위원회에서 <올바른 성모신심>이란 책자가지 발간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귀족적인 위엄있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절대군주들과 맺었던 동맹이 다소 삐그덕거리기는 하였지만 가톨릭국가에서 교회는 교육과 환자치료를 독점하고,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어떤 통치자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귀족정치아래서 주교들은 ‘성사집행보다 교구를 다스리는데 더 치중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교구민과 시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57개 교구가 압박을 받았으며, 교황은 대주교 정도로 강등되고, 모든 사제는 시민법을 존중한다는 선서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다시 상황을 바꿔놓았다. 오히려 그 후로는 교황권 제한주의에서 교황권 지상주의로 돌아가고, 인간의 타락이야말로 참된 현실이며 오랜 통제수단이 더 안전하다는 보수적 견해가 힘을 받고,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서 일어난 마리아 발현은 가톨릭교회를 새로운 열정으로 채웠다. 로마는 많은 이를 계몽주의가 낳은 의심의 고통에서 구해주었고, 모두가 안심하고 안길 요새를 제공하는 듯 했다. 또한 로마는 서둘러 요새를 떠나려는 자들에게 ‘지옥의 두려움’이라는 오래된 위협을 다시 가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 100년간 교황권은 대중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점점 더 많은 성인(聖人)들을 공급하고, 새로운 신심형태를 만들어갔다.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 티 없으신 성모성심과 거룩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 특히 감실 안에 계신 성체께 대한 신심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고 교황은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연장선에서 교황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교의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가톨릭신자들은 교황이 ‘지상의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조건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갔다. 1854년에는 성모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1862년과 1865년에는 몇 천 명의 주교와 사제와 평신도들이 로마에 모여 대규모 축제를 벌였다. 1864년에는 근대세계에 반대하는 교황선언인 <오류목록>(Syllabus of Errors)을 반포했다. 이것은 철학, 과학, 문학, 신학 분야에서 이룩한 대부분의 진보를 단죄한 80개의 명제로 구성된 문서다. 범신론에서 성경 연구모임까지, 시민학교에서 교회일치운동까지, 표현의 자유에서 여러 다른 종교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단죄했다. 이 문서는 교황좌만이 거룩한 것을 선언할 독점권을 지녔으며, 교황은 진보의 흐름에 발맞춰야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리아시대, 은총의 통로가 된 성모
말로운은 가톨릭교회가 여성해방운동에 맞서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마리아’가 유효하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19세기 가톨릭교회는 여성해방운동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으며,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회칙 <불멸의 하느님>(Immortale Dei))을 반포하면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해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구절을 상기시켰다.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여성을 공장에서 중노동 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은 집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마리아론자인 베륄, 올리에, 외드는 각자 고유한 마리아론을 주장했는데, “사제는 마리아와 혼인해야 하고 성모성심을 예수성심과 똑같이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많은 사제들이 자신을 ‘마리아의 종’으로 봉헌했다. 18세기 중엽 알폰소 데리구오리는 <마리아의 영광>을 출판해 “마리아는 밟아 누르는 여 지배자”이며 “모든 은총은 그분을 거쳐 나온다”고 주장했다. 말로운은 1950년 12월 8일에 있었던 성모승천 교의 선포로 마리아 찬양시대가 막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 성모승천 교의를 두고 심층심리학자인 칼 융은 ‘여성성의 신격화’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마리아시대는 지배하는 남성과 특유하게 영광을 입은 여성이라는 매우 다른 두 인간성의 이분법이 승리한 때이며, “마리아는 성과 상관없는, 육체에서 이탈한 순수함을 지닌 채, 여성들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여성이 없이 교회유지도 어렵지만, 여성은 '영원한 조력자요 보조자' 오늘날 남자들이 교회를 포기하고 정치권력과 경제적 성공에 매달리는 사회에서 여성은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여성은 성경을 공부하고 육아와 선교를 수행하며, 수많은 자모회와 선교회, 본당에서 활동하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을 기부해 왔다. 이처럼 교회에서 여성들이 없으면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나, 여성에 대한 교회의 갖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기 생활과 교회 안에서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영원한 조력자요 눈에 안 띄는 보조자로 머물 때 마리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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