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지구의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하와는 인간의 살(肉)로 창조되었다
여성사제 수품과 해방된 여성의 미래, 도로시 데이
[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여성과 그리스도교 3>,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11
2012년 02월 10일 (금) 18:47:59 한상봉 기자 isu@catholicnews.co.kr

   
▲ 슬픔의 성모. (from a triptych by the Master of the Stauffenberg Altarpiece, Alsace c. 1455. Image: Vincent Desjardins)

예수 그리스도를 해방자로 보든 치유자로 보든 분명한 것은 ‘체제의 유지를 돕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먼저 잡아주었으며, ‘연민’의 시선으로 만사를 바라보았고, 그 힘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그리스도교 여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여성들의 삶이 남성 중심의 교회제도 안에서 은폐되었으며, 이들이 교회 역사 안에서 다시 자신들의 목소리와 신원을 되찾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메리 말로운(Mary T. Malone)은 <그리스도교와 여성 3>에서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여성들이 새로운 자의식을 갖기 시작했음과 지난 100년에 걸쳐 ‘여성사제 수품’ 요구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여성사제 문제는 성공회에서 논의가 시작되어 개신교로 번져나갔는데,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아마도 2천년이라는 묵은 전통이 새로운 전통에게 길을 터주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연 듯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세상 속으로 교회의 창문을 열어젖혔듯이, 새로운 일이 시작될 지도 모르겠다.

메리 말로운은 이 새로운 이야기를 노예제폐지론자였던 미국의 사라와 안젤리나 그림케 자매를 통해서 시작한다. 그들 자매는 노예해방에서 여성해방으로 나아갔다.

노예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 무지개 빛깔만큼 조화로운 것

사라와 안젤리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시의 유복한 노예 소유주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우연히 채찍을 맞는 노예를 보고 노예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마다 읽는 성경과 노예에 대한 잔혹한 대우 사이에 모순을 느꼈다. 영국 성공회 소속이었던 이 자매는 노예가 직접 성경을 읽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던 이 교회를 떠나 퀘이커로 개종했다. 퀘이커는 노예제도 폐지정책을 지지했고, 갈라티아에 보낸 바오로의 편지 3장 28절의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는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사라와 안젤리나는 연설을 통해 “나는 남자가 누리는 권리는 무엇이든 여성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권리를 벗어난 권리는 없다고 인정한다. 노예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는 무지개 빛깔만큼이나 조화로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고, 필요한 것은 ‘내적 자유’라며, 노예들이 기꺼이 감수하는 복종과 학대는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매는 “예수가 가르친 메시지의 핵심은 갇힌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후, 이들 자매는 <성(性)평등>이란 책을 통해 흑인노예제와 여성노예제가 서로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라는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교리가 얼마나 반그리스도교인가!” 물으면서 ‘복종으로 통치하고 항복으로 군림하라’는 격언을 인용하며 “여성이 위선자가 되어 굴종하는 체하면서 상대에게 점수를 얻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반발했다.

아담은 지구의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하와는 인간의 살(肉)에서 창조되었다


   
역사상 여성들은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해 왔으며,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헬프타이 여성들과 피잔의 크리스틴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도 남성 성직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비하의 수사학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발전하면서, 성경은 새롭게 이해되었고, 두 가지 통찰에 이르렀다.

첫째는 여성이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와가 하느님의 걸작품으로, 아담보다 나은 물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지구의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하와는 인간의 살(肉)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는 여성의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은 성경 자체가 남성중심적임을 발견했다. 성경은 전적으로 남성중심적이며, 오직 남자들만이 공식적으로 해석해 왔으며, 마침내 남성 교회지도자들이 자기네 뜻을 강요하는 정치적 도구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남자들이 만들어낸 책이기에 하느님께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1895년경 지은 책이 <여성성경>이다. 그녀는 이 <여성성경>을 통해 제도교회가 여성의 삶을 옥죄어 온 틀을 깨려고 하였으며, 예수가 약속했던 철저한 평등은 교회 안에서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한편 30세까지 흑인노예로 살았던 소저너 트루스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기억력이 뛰어나 성경의 대부분을 기억했는데, 자신보다 더 배운 사람들에게 “너는 책을 읽지만, 나는 하느님과 얘기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공부하고 기도하는 신비적 모범을 배웠고, 아프리카 전통에 속하는 환시적 지혜를 얻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성경에 자기네 의견을 상당히 많이 집어넣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는 어떻게 세상에 왔는가? 하느님이 그분을 창조했고 한 여성이 그를 낳음으로써 들어왔다. 남자여, 당신은 이 일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가?” 물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에, 기번스 추기경은 1911년 <뉴욕 글로브>와 인터뷰에서 여성참정권을 반대하며 “왜 여성이 추악한 정치에 뛰어들어 스스로의 체면을 떨어뜨리는가? 왜 여성이 자기 집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정치게임에 놀아나려는가?” 물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같은 성녀 이미지로 넘쳐났다. 그녀는 ‘작은 길’을 실천해 성녀가 되었고,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이것은 드러나지 않는 영성이며, 날마다 작은 일상에 봉헌하는 것으로 교회의 지향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한편 이 즈음에는 아일랜드 성모자헌수녀회, 성심수녀회, 자비의 수녀회,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등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성 수도단체들이 비약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들은 교육과 환자돌보기, 사회봉사 분야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1917년 개정된 교회법은 그들을 중세식의 봉쇄생활이라도 해야 할 듯 대우했고, 영성생활 기법과 수녀복 등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여성에 관한 논의의 귀착점, 여성사제 수품

   
메리 말로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구성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에 관한 논의가 ‘여성사제 수품’이라는 특정문제로 수렴되고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문제는 낙태 및 사제 독신 문제와 함께 ‘공포와 혐오를 동반’하면서 거론되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는 아직 문턱이 존재하지만, 성공회에서는 1992년에 치열한 논쟁 끝에 투표에 붙여 여성사제를 허용했다. 당시 반대자 중 한 사제는 “우리가 예전에 그들을 불태웠듯이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발언할 만큼 이 문제는 반대자들에게 공포와 격노, 경악을 불러왔다. 여성사제 수품 문제는 주로 성공회와 감리교 전통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공식적인 토론이 거의 없었다.

1956년 미국 장로교회는 마거릿 타우너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고, 하버드대학과 감리교신학대학에서는 여성에게 신학과를 개방했다. 성공회의 경우에, 1944년 홍콩에서 홀(Hall) 주교가 팀 오이 리(Tim Oi Li)라는 여성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 사건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요청으로 당사자가 사임해 일단락되었다. 그 후로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수품 문제는 계속 논란거리가 되었다. 성경에는 여성사제 수품 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주로 하느님의 남성성과 예수가 남성이라는 사실이 토론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토론에서, 여성의 위험천만한 본성과 악마와의 연관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승들이 환기되었고, 여성은 자기 주인인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일반적 논거, 하와의 딸인 여성의 지위, 코린토 서간과 티모테오 서간의 명령 등이 반대논거로 주장되었다. 여기에는 여신의 복귀에 대한 두려움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마침내 여성들이 선수를 쳤다. 1974년 7월 29일 베타니아의 마르타 축일에 여성 11명이 필라델피아에서 은퇴한 성공회 주교 두 명에게 서품되었다. 이듬해 9월 또 다른 여성 4명이 워싱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76년부터는 미국 성공회가 여성 수품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1984년에는 여성수품운동(Movement to Ordain Women)의 노력으로 여성사제 수품 입법안이 마련되었고, 1990년에 아일랜드 성공회는 더블린의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버지니아 케널리를 사제로 서품했다. 그리고 1992년 마침내 영국성공회는 시노드를 통해 여성사제 수품을 허용했다.

여성사제 수품을 허용한 성공회
“구원받은 인간성 안에 나머지 절반인 여성도 포함”

한편 가톨릭교회는 1984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캔터베리 대주교 런시와 여성사제 수품을 두고 서한을 교환하면서 처음 의견을 나누었다. 교황은 성공회와 친교가 진척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사제 수품은 ‘교회일치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고, 런시 대주교는 성공회의 여성사제 수용 문제는 ‘심사숙고한 교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답했다.

당시 영국 성공회는 여성사제 허용의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여성사제 수품을 반대할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여성사제를 금지할 신법(神法)이 없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절반인 남성이 구원을 나누어 받는다면, 그 구원받은 인간성 안에 나머지 절반인 여성도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제의 특성은 수품을 통하여 교회 전체의 사제성을 대표하도록 위임받았다는 사실과, 특히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온전한 인간성이 구원되신 대사제인 그리스도와 특별한 성사적 관계를 맺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면서, 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성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개방된 사제됨 안에서 더 적절히 표현된다고 밝혔다.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사회는 거의 다 배타적인 남성주도권을 포기했고, 그 결과 ‘남성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사제직의 대리성이 사실상 약화되었다’고 판단했다. 성공회의 런시 대주교는 여성사제 문제로 교회 안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지만, 여성사제 수품은 ‘일반적으로 유익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성사제 금지한 가톨릭교회“
사제는 하느님 백성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그리스도는 남성이었다”


   
▲사진 출처/ http://www.cathnewsusa.com/

한편 가톨릭교회의 월러브런즈 추기경은 이에 대응해서 여성사제 불허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추기경은 1976년에 발표한 <여성 교역 사제직 불허 선언>과 1994년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발표한 <남에게만 유보된 사제서품에 관하여>를 인용하며 “교회가 남성한테만 사제품을 준 관례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추기경은 사회문화적 측면이나 세속사회에서 갖는 여성의 위치 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가 남성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사제는 본래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비록 부족하지만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성성을 거듭 강조했다.

메리 말로운은 “가톨릭교회는 줄곧 여성의 소리와 체험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여성에 비해 남성이 더 신성하다는 전제아래서 여성사제 수품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여전히 여성의 ‘본질’이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을 대리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남성의 몸이야말로 성찬례를 거행하기에 적합하다면서, “사제직무와 성찬례는 씨앗을 전수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성찬례는 예수가 당신의 온몸을 끊임없이 풍요롭게 쏟아내시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한 남성이 잠깐 동안 자신의 제한된 몸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그러한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이를 두고 여성신학자인 티나 비티(Tina Beattie)는 “이것은 성찬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한 게 아니라 남성의 사정(射精) 체험으로 본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처럼 가톨릭교회는 남성의 몸을 신성화하면서도, 여성의 출산과정을 ‘죄’에 물든 것으로 보아, 심지어 수녀들은 간호일에 종사하면서도 임산부를 돌보는 일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육화’에 있음에도 교회는 여성의 몸과 관련된 출산행위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거룩함’의 대열에서 배제시켜왔다. 즉, 한 사람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은총의 통로로 보았지만, 출산은 ‘원죄’라는 죄스러운 원천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서 메리 말로운은 ‘교회가 여성/여성사제를 두려워하는 뿌리’를 발견한다.

“그 뿌리는 여성의 몸을 더럽다고 보고 정결예식을 행한 고대의 금기들 안에, 여신에 대한 고대와 현대의 두려움 속에, 몇 세기 동안 지속된 마녀에 대한 공포 속에,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여성들의 은밀한 지식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여성이 몸이 지닌 존엄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마도 전통적인 신 관념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메리 말로운은 여기서 남성의 보편적 지배체제가 위계라는 종교적 서열과 결합되고, 이러한 서열에 인류를 위한 신의 계획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결합되어 ‘여성에 대한 억압’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가톨릭교회를 졸업한다?

가톨릭교회가 명백하게 지속적으로 여성의 ‘몸’과 여성사제를 거부함으로써, 이에 대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페미니스트 그리스도인(Feminist Christian)은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은 애착을 보이면서도 교회조직 안에서 자신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느끼며, 자신들의 예배능력이 압도적인 남성적 언어와 상징에 의해 끊임없이 거세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분노와 거부상태로 갈등을 빚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 교회 안에서 많은 선익을 끼쳤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교회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페미니스트(Christian Feminist)는 자신이 사는 교구나 교회를 이따금 방문하지만 ‘여성교회’ 등 대안공동체를 추구한다. 이들은 더 이상 가부장적 전통이나 남성적 상징체계와 협상하려들지 않고 새로운 언어와 전례를 만들며, 직접적 정치참여와 더불어 여성과 모든 피조물을 돌보는 일에 힘쓰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교회를 개혁하려고 일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교회’라고 여기며 활동한다.

메리 데일리와 다프니 햄슨 등 탈(脫)그리스도교 페미니스트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너무나 가부장제에 젖어 있어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교회와 제2의 성>을 쓴 메리 데일리는 “나의 가톨릭교회 졸업은 나 스스로에게 수여한 학위다. 곧 내가 1973년에 두 번째로 펴낸 페미니스트 저서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로 공식화되었다”고 말했다.

성인의 길로 들어선 마더 데레사
결코 시성되지 않을 도로시 데이


   
▲ 마더 데레사와 도로시 데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가장 모범적인 가톨릭여성이었지만, 그네들의 비전과 행동양식은 사뭇 서로 달랐다.
<여성과 그리스도교 3>는 마지막으로 ‘포괄적 지구윤리를 향하여’하는 장을 마무리하면서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와 도로시 데이의 삶을 비교한다.

메리 말로운은 두 여성이 20세기 후반 50년 동안 뛰어난 활동을 펼쳤지만, 서로 만난 일도 없고, 아마도 서로 좋아하거나 서로에게 동의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고 전한다. “마더 데레사는 빠르게 성인으로 추대되리라고 말해지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아마도 결코 시성되지 않을 것이며,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의 삶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종결지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페미니스트들이 ‘돌봄의 윤리’라고 부르는 것을 구체화시켰고, 다른 한 사람은 한평생 ‘정의의 윤리’를 위해 헌신했다. 두 여성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으며, 마더 데레사는 ‘페미니스트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마더 데레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뿐 아니라 후원을 독려하기 위해 고위층 권력자들과도 만났으며 그들 가운데는 무도한 지도자도 있었다.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1992년에 수도원장으로 재선출되어 퇴임한 1997년 9월에 세상을 떠나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마더 데레사는 콜카타 슬럼가의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열렬한 존경을 받았는데, 그녀의 수도공동체는 ‘바로 전통적 노선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었다. 수녀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따르게 하였고, 마더 데레사는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부자, 대통령들을 만났으며, 그들에게서 자금과 후원인을 찾았다.

마더 데레사는 그리스도교 여성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데, 대다수 그리스도교 여성은 자신의 비전 수행과 교회 권위 요구 사이에 미묘한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교회가 요구하는 대로 완벽하게 돌봄의 윤리를 살았고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그녀는 앞선 세대의 수녀회 설립자들과 달리, 콜카타의 슬럼가를 짓누르는 고통이나 경제적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과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가 요구하는 전통적 여성상에 부합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여성의 미래를 위해 약속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면에 도로시 데이는 평생 미국 슬럼가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고 연대하면서, 공명정대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속권력이든 교회권력이든 맞대응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터 모린과 더불어 ‘가톨릭일꾼’(CatholicWorkers) 운동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영적 비전을 담은 신문을 발행하고, ‘환대의 집’을 열어 노숙인들을 먹였다. 그가 내건 슬로건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정부와 가톨릭교회의 공식 입장을 거슬러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마지못해 할당한 비인격적 복지를 혐오했으며, 정부와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의 자발적 후원에 의존해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직접 보며 음식을 주는 일을 계속했다. 그의 연민과 정의의 윤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의 위대한 여성들과 비전을 공유했으며, 이를 자신의 혁신적 좌우명으로 표현했다. “그리스도를 다시 지구에 모셔 오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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