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든, 밥하든, 숨쉬든 다 매스컴 사도직 위해 봉헌했죠”
축성 생활의 날에 만난 사람 / 성바오로딸수도회 우제열 수녀
가톨릭 평화신물 2020.02.02발행 [1549호]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이다. 올해로 한국 파견 60주년을 맞는 성바오로딸수도회(관구장 이금희 레티치아 수녀)에서만 오롯이 57년을 살아온 우제열(베네딕다) 수녀를 만났다. 79세 고령에도 기쁘게 수도회 유튜브 채널 ‘성바오로딸’에 출연하는 노수녀의 얼굴은 해맑다. 그리스도의 구원 희생에 한 생애를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자신을 ‘남김없이 건네고 되돌려드린’ 수도자답다.
“수녀님, 기도해 주세요.”
전국 16개 바오로딸 서원에 가면 ‘기도 우체통’이 있다.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듯’ 사람들은 기도 우체통에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기도 지향을 담은 쪽지를 넣고 총총히 사라진다.
그 기도 지향에서 많은 이들이 청한 기도 주제를 골라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도자들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기도 주제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어 연주하고 노래하고 기도를 바친다. 그 사이에 우제열 수녀는 자신이 바칠 기도문을 작성해 출연한다. 기도는 안세옥(그라시아나), 이민선(마리마들렌) 수녀와 함께 돌아가며 한다.
“기도를 청하는 분들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알기에 더 열심히 기도하게 돼요. 지난해 대림 시기에 시작돼 8차례 방송됐는데, 제 기도가 큰 위로가 됐다고 댓글이 달리니까 저도 보람이 커요. 구독자는 아직 많지는 않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기쁩니다.”
우 수녀가 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18년간 성경 묵상 잡지 「야곱의 우물」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는 2018년 12월호를 끝으로 잡지가 종간되면서 공동체 봉사 소임을 받았다. 수도회 10개 분원 식구들이 본원에 다니러 올 때마다 쓰게 되는 손님방 6개를 청소하고 침대 시트를 가는 일을 했다. 또, 수도원 구석구석을 다니며 청소하고, 눈비가 올 때면 옥상에 세탁물이 널려 있는지 살피고 거둬들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안내실 사도직도 맡았고, 틈틈이 수도원 화초를 가꾸기도 한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일, 그게 그의 사도직이다. 그래도 그는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게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매스컴 사도직 위한 다양한 소임 실천
그렇게 살아온 수도생활 57년을 우 수녀는 어떻게 기억할까?
“청소하든, 밥하든, 숨 쉬든 다 매스컴 사도직을 위해 봉헌되는 것”이라는 설립자 알베리오네 신부의 말로 자신의 수도 생활을 대변했다.
소임은 물론 다양했다. 성바오로딸수도회가 한국에 파견된 지 3년 만인 1963년 12월 입회한 그는 한국에서 청원기를 거쳐 당시 한국 공동체가 소속돼 있던 일본 관구로 건너가 1년의 수련기를 보내고 1968년에 첫서원을 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문서 선교를 시작했고, 1976년 종신서원을 했다. 가정 방문 선교 사도직을 시작으로 단체 방문 선교, 전주 바오로딸 서원 사도직, 부산 분원 책임자, 본원 주방 사도직, 중앙보급소, 서원 사도직 등을 두루 거쳤다. 「야곱의 우물」 잡지 발송을 하면서 본당 선교, 독자와 은인ㆍ협력자 관리 등을 했다. 안 해 본 게 없다.
대전교구 공주본당에서 키운 성소
그가 성소를 키운 건 대전교구 공주본당, 지금의 공주 중동본당에서였다. 8세 때 초등학교 입학 직후 첫 영성체를 한 뒤 “수녀님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본당 수녀의 권고가 그를 수도자로 이끌었다. 매일 새벽 미사에 가면 성당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프랑스 선교사 방여종(Blassier Augusde) 신부도 잊지 못한다. “예수님 친구가 돼 드리라”고 늘 당부하던 방 신부의 권고 덕에 그는 수도자로 평생을 살 수 있었다.
“저는 4남 3녀의 둘째이자 맏딸인데, 형제들의 신앙은 부모님(우현대 요한 사도ㆍ김종희 아나스타시아)께 물려받았습니다. 어렸을 적 온 가족이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바치던 추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해 전, 2017년에 99세로 백수연(白壽宴)을 했는데, 그날 미사 영성체 행렬이 무척 길었어요. 그 긴 행렬에 어머니가 크게 감동을 받으셨지요. 이분들이 다 어머니 영향으로 신자가 되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운전하는 수녀’로 유명했다. 지금의 짙은 군청색 수도복으로 바뀌기 이전에 검은 수도복을 입은 우 수녀가 운전하면, 가는 데마다 교통경찰들이 거수경례를 했다. 1970년대만 해도 수녀가 운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운전을 배운 건 일본에서 수련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수련장 수녀가 운전을 배워보겠느냐고 묻길래 처음엔 “겁도 많고 멀미도 심해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수련장 수녀는 “겁이 많은 게 운전하는 데 더 낫고 핸들을 잡으면 멀미가 없어진다”고 대꾸하더란다. 그래도 말미를 달라고 해 한 달간 기도했는데, 식사 때 영적 독서 중 “나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사도 20,2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져 운전할 용기를 냈다.
운전대 잡고 누빈 사도직 현장들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가정 방문을 하고, 사도직 현장도 달렸다. 1977년 선교 사도직을 맡게 되면서 운전과 함께 단체 선교를 참 많이도 했다. 본당과 학교, 공장, 병원 등지를 주로 다녔다. 울산이나 여천 공장 지대나 삼척 탄광지대에 선교를 다니던 기억도 생생하다.
영원히 이어질 문서 선교
서원 사도직도 잊을 수 없다. 1969년 바오로딸에서 첫 번째로 진출했던 전주 분원을 시작으로 부산ㆍ대구 분원 등에서 서원 사도직을 했다. 지난해 분원 진출 50주년 행사를 했던 전주 분원은 바오로적 사명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던 공동체였다.
이제 교회나 세상을 보면, 문서 선교는 거의 끝나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우 수녀는 “문서 선교는 영원히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며 “성령께 의탁하고 기도와 작은 희생을 봉헌하면서 문서 선교와 함께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음원과 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 수단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이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새해로 성바오로딸수도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맞는 우 수녀는 “감사를 드릴 것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한 자매들을 저희 수도회에 보내주신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특별한 표지가 아니겠어요? 이제 디지털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저희를 높은 설교대에 올려주신 하느님 자비에 감사를 드리며 제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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