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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바오로딸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바오로딸수도회 (상) - 가톨릭신문

by 바오로딸 2021. 4. 29.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바오로딸수도회(상)

새 시대 새 사도직 수행을 위해

1915년 여성 작업실 마련
데레사 메를로와 함께 활동
재봉 기술과 교리 교육 펼쳐

가톨릭신문 2021-03-14 [제3235호, 4면]

 

‘모두 나에게 오너라.’(venite ad me omnes)

성 바오로 딸 수도회를 창립한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왼쪽)와 가경자 테클라 메를로 수녀. 성 바오로 딸 수도회 제공



1901년 12월 31일 밤. 당시 이탈리아 알바교구 신학생이었던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밤샘 기도를 하던 중 성체로부터 특별한 빛이 오는 것을 느꼈다. 빛이 비춤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살아야 하는 부르심을 느꼈다. 이 말씀은 알베리오네 마음에 새로운 세기 사람들을 위한 새 시대, 새로운 사도직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할 ‘수도 가족 창립’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1907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은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1914년 바오로수도회 전신인 ‘작은 노동자’ 인쇄 학교를 설립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에도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던 그는 1915년 6월 15일 인쇄학교가 위치한 케라스가 광장에 ‘여성 작업실’을 열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제서품 1년 만인 1908년 「사제의 열의에 참여하는 여성」을 저술해 ‘교회 내 여성들의 사도직 참여 열정을 절대 배제하지 말 것’을 강조한 바 있는데, 작업실 마련은 이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것이기도 했다.

작업실은 시작됐으나 인력 확보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이때 알베리오네 신부는 재봉 교사이자 교리교사였던 데레사 메를로를 만난다.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자 평소 수도 생활을 꿈꾸던 데레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이 작업실에서는 젊은 여성들에게 재봉 기술과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서원을 개원해 인쇄학교에서 제작된 서적을 보급하고 성물을 판매했다. 1918년에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수사(Susa)지역에 진출해 교구 주간지를 발행하게 됨으로써 고유 사도직을 시작하게 됐다.

특별한 명칭이 없었던 이들 공동체는 성 바오로 사도에 대한 깊은 신심을 눈여겨본 주위 사람들로부터 ‘바오로 딸’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수도회 공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1922년 7월 22일 회원 9명이 첫 종신서원을 했고 데레사 메를로는 성 바오로 사도 제자였던 ‘테클라’라는 수도명으로 초대 총장에 임명됐다. 1929년 3월 15일 알바교구 관할 수도회로 인가받은 성 바오로 딸 수도회는 1953년 3월 15일 비오 12세 교황으로부터 수도회 인가와 회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았다.

회원들은 1931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1930년대에 미국, 중국과 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회원 수가 점차 증가하며 유럽 지역 외에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도 계속해서 파견됐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성 바오로 수도회(1914), 성 바오로 딸 수도회(1915) 창립 이후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 선한 목자 예수 수녀회, 사도의 모후 수녀회와 재속회 5개를 세웠다. 그는 바오로가족 모두에게 사도 성 바오로를 수호자요 아버지로 세웠다. 바오로 사도의 정신은 수도회 존재와 활동을 살리는 원천이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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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 바오로 딸 수도회 (상)

‘모두 나에게 오너라.’(venite ad me omnes) 1901년 12월 31일 밤. 당시 이탈리아 알바교구 신학생이었던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교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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