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희망함으로, 지금 여기에 깨어 있기
[서평] 안셀름 그륀 신부의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바오로딸, 2011)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우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살아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인생사에 집착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들에 대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릇 생명이란 유한성의 세계에서 더 찬란한 그것이며 생명가진 것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즉 죽음에 대해 깨어있고자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죽음의 때를 알 수는 없을지라도 생이 끝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하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죽음을 자아의 완전한 소멸이나 삶의 몰락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관문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천국, 연옥, 지옥 등의 표상과 연결시키고 이를 통한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부활을 말해왔다.

성경과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융의 분석 심리학을 연구한 안셀름 그륀 신부는 그의 책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바오로딸, 2011)에서 이런 표상들의 의미를 해석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답한다. 저자가 ‘삶과 죽음의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심리학적, 철학적, 성서적 견해를 살피고 희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길로 인도하는 일종의 ‘죽음 묵상집’이다.

그륀 신부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융의 진술을 소개하며 인간 영혼 깊은 곳에는 영원한 삶에 대한 예감이 있다고 말한다.

“융에 따르면 인생의 중반기부터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생생하게 살아간다. 죽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사상은 현세의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는 성공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것에 더욱 활짝 마음을 열게 된다.”

심판과 연옥, 그리고 지옥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정렬된다는 희망

그륀 신부는 또한 여러 가지 신학적 개념은 궁극적으로 사실이기보다는 하나의 표상에 가까우며 신학은 우리가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는 표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체험과 그 표상이 지금 여기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륀 신부는 심판, 연옥, 지옥, 천국에 대해 신학적 대답을 시도한다. 그는 심판의 본질적 의도는 공포나 불안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 삶에대한 철저함을 가져야한다는 경고라고 말한다. 동시에 심판은 인간이 지상에서 겪는 모든 불의가 조정되리라는 희망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구원의 희망이다. 그는 연옥 또한 장소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지칭하는 표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철저히 자신의 밑바닥을 만나기에 “사랑은 정화와 교정의 고통 없이는 몰두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연옥 또한 우리 실존이 하느님을 향해 개방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자비로운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고통이 연옥이라는 것이다.

심판과 연옥이 모두 하느님을 향해 정렬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즉, 잘못하고 연약한 모습을 지닌 우리가 누구인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정렬되는 것이 심판과 연옥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과 연옥은 ‘형벌이 아닌 은총’이다.

지옥도 이런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옥의 형상은 인간이 자신을 폐쇄시켜 죽음 뒤에 뒤늦게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며 그런 닫힌 마음이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은 인간이 하느님께 마음을 닫는데서 생긴다. 지옥에 대해 경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패할 수 있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륀 신부는 심판과 연옥, 지옥에 대한 형상을 설명하면서 간혹 신앙인들에게 보이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동기들이 이에 연결되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했다. 누군가가 심판을 받거나 지옥에 가기를 바라게 될 때, 거기에는 타인을 향한 보복감정, 예수를 따라 사는데 대한 욕구불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심판과 지옥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한다.

천국은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된 상태

그는 또한 요제프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해석을 통해 천국이 ‘인간 존재가 하느님과 맞닿은 상태’라 정의한다. 다만 충만한 사랑인 천국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받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맞닿음, 혹은 일치는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천국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합일된 천국의 순간에도 ‘자아’그리고 ‘독립된 인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바다에서 사라지는 하나의 물방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해석의 바탕에는 몸이 깊은 체험을 기억하는 곳간과 같다는 심리학적 인식체계가 깔려있다.

“많은 사람이 천국을 마치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통합되어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있을 수 없고 인격도 찾아볼 수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다르게 생각한다. 인격은 육신으로 표현된다. 모든 인간은 일회적이며 유일한 존재이며 죽음으로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과 화해하지만 자신의 인격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일회적 모습을 본래대로 순수하게 간직할 것이다.”

한편 그는 신학자 오트마르 푹스의 해석을 통해 성인들의 전구는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하는 기도’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청할 때 성인들이 스스로 이전의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이들과의 일치와 연대 속에서 기도는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죽은 이들한테도 적용된다. 즉, 지상에서 가졌던 것보다 더 큰 마음을 지니며 하느님과 화해한 죽은 이들은 천국에서도 우리 삶의 여정에 동행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간혹 죽은 이들과 화해하지 못한 상태로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런 죽은 이들과의 연대는 또 다른 화해를 불러일으키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 또한 인간 삶의 일부이며 뿌리
죽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는 이런 해석에 이어 결국 죽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그륀 신부는 과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 수고의 보상을 받기 위해 이 지상을 되도록 빨리 떠나고 싶은 눈물의 골짜기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언제나 두 개의 차원임을 강조한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희망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과의 친교에 대한 희망이다. 이런 두 개의 희망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은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기다릴 수 있고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성하리라 희망하며 살아간다. 희망은 또한 짐을 덜어준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실현하지 않아도 된다. 죽음을 거쳐 가더라도 여전히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게 하거나 되도록 많은 업적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단번에 끝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인내하는 기다림은 현재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도록 이끈다. 희망은 지금 이 순간을 도피하도록 종용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고치거나 미래를 완전하게 가꾸지 않아도 된다. 희망은 우리를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도록 이끈다.”

희망 속에서 죽는가, 절망 속에서 죽는가, 확신을 지니고 기대 가운데 죽는가, 불안과 근심을 지니고 죽는가는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있다.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정답은 있을 수 없을지라도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은 결국 삶을 인식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적 표상은 인간이 하느님께 똑바로 정렬되는 상태로 죽음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리라는 희망을 말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빛을 희망하는 것, 죽음이 소멸이 아닌 삶의 완성이라는 인식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어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필리 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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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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