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로 돌아온 비둘기(1851)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1829-1896)



두 소녀가 있습니다. 한 소녀는 비둘기를 품에 안았고, 다른 한 소녀는 비둘기의 날갯죽지에 입 맞춥니다. 비둘기는 젖은 것처럼 보입니다. 채 마르지 않은 깃털들이 삐죽삐죽하지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이 그림은 대홍수 때 노아 일가와 동물들만 살아남았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노아의 나이가 600세였는데, 그림에는 나이 든 노아 대신 앳된 소녀들이 등장하지요. 이들이 노아의 며느리라고 해요. 빛나는 금발머리와 홍조를 띤 볼, 도톰한 입술. 소녀들이 있으니 오래된 이야기가 한결 산뜻하게 다가옵니다.

비둘기는 어린 올리브 잎을 물고 왔습니다. 어린잎은 곧 대홍수가 그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소식이지요. 이렇게 기쁜 소식을 갖고 온 비둘기이니 얼마나 귀하고 반가웠을까요? 비둘기를 품에 안은 소녀의 마음, 비둘기에 입을 맞추는 소녀의 마음 모두 헤아려집니다. 오랜 비도, 물에 잠긴 것들이나 휩쓸려간 것들도 지금 떨고 있는 비둘기에 비추면 다 과거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비둘기는 좋은 뜻을 나타내는 새였어요. 앞서 언급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만 봐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희망의 상징이었지요. 동시에 다시는 물로 사람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뜻을 전달한 평화의 상징이었구요. 요즘 사람들도 비둘기더러 ‘평화의 상징’이란 말을 하곤 합니다. 수가 너무 늘어난 데다 세균과 바이러스를 옮긴다며 홀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지만요.

몇 년 전 베네치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중심지에 위치한 산마르코 광장에 들렀을 때예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지요.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고,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변에 비둘기들이 많았어요. 지붕이면 지붕, 광장이면 광장, 어느 곳을 봐도 비둘기가 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요. 녀석들은 구구거리며 떨어져 있는 것들을 부지런히 쪼아 먹었습니다.

함께 있던 친구가 비둘기를 보며 한마디 하더군요. “저놈의 비둘기, 콱 밟아 죽이고 싶어!” 꼬질꼬질한데다 길을 가로막고 있고,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으니 나온 말이었을 거예요. 그 뜻은 알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서늘해지더라구요. 비둘기의 목숨이 사람 손에 달린 것은 아닌데. 어쩌면 사람이 비둘기보다 더 더러울지도 모르는데.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가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하니 씁쓸해졌지요.

「성북동 비둘기」란 시가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각박해진 인간상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에요.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많이들 보셨겠지요. 비둘기가 인간과 환경에 해를 끼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허나 그렇게 되기까지 사람들이 한 일은 없을까요? 비둘기가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단정해도 되는 걸까요? 그런 점들을 돌아보며 이 자리에서 「성북동 비둘기」를 함께 읽어보고 싶네요. 한번쯤은, 새 소식을 물고 온 비둘기를 기쁘게 맞는 소녀의 마음으로요.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전문

- 광고팀 고은경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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