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태 지음 | 140*200 | 276쪽 | 바오로딸
그해 3월 25일, 나는 수녀원에 입회했다. 마냥 좋았다. 함께 웃고 떠들 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 우리만 기쁘게 살아도 되나 할 때도 있을 만큼 좋았다.
어느 날 아침, 창밖에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흙냄새에 섞여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내 마음이 나한테 뭔가 얘기를 하는데, 알듯 모를 듯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하느님이 좋아서 이 삶을 선택했을 뿐인데, 현실은 나와 하느님만 사는 게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자매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낯선 수녀님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우리는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말하는 투도 배려하는 방법도 서로 너무 달랐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의 맨살을 드러내고 자매들의 속살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추고 싶었던 나의 상처가 자매한테는 치유의 힘이 되고, 자매의 슬픔은 더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다. 주님의 신비였다. 우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사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
재복이 양업과 방제의 손을 꼭 잡았다. 셋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셋은 비로소 유비 · 관우 · 장비의 도원결의를 실감했다.
재복이 선창했다.
“천주님을 위해 한날한시에 죽기를 각오한다!”
방제와 양업이 눈을 마주한 뒤 한목소리로 되뇌었다.
“천주님을 위해 한날한시에 죽기를 각오한다!”
셋은 둥그렇게 서서 진정으로 한 형제가 된 기쁨을 나누었다. 모진 고난을 함께 넘으며 쌓은 우정이었다. 태풍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우애였다. (「세 신학생 이야기」214-215쪽에서)
***
김재복(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이다. 죽음을 각오했던 박해시절,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처음 만나 공동체를 이루고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이 주님 안에서 쌓아 갔던 우정은 어떤 색깔일까?
- 유 글라라 수녀
* 유 글라라 수녀님 블로그 '바람 좋은 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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