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란 지음 | 박인숙 정리 | 140*200 | 208쪽 | 바오로딸

 

 윤영란 수녀님(성바오로딸수도회)이 들려주는

성소 이야기, 사도직 이야기!

수녀님은 전국을 다니면서 어르신들과 함께 성경공부, <새로 나는 성경공부>를 한다.


책을 읽기보다는

수녀님의 고유한 말투와 표정으로 듣는 느낌이다.

인용한 본문이 좀 길긴 하지만 함께 느껴보고 싶어서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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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절로 신명이 납니다. 수업에 집중을 하는 듯 마는 듯해도 한 주일, 두 주일 시간이 흐르면서 어르신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9월에 시작한 성경공부가 어느 새 넉 달이 지나 겨울 방학이 다가왔습니다. 한 학기를 마감하며 이런저런 당부를 드리고 있는데 교실 밖에서 한 중년 부인이 서성이고 있었어요. 화려한 모피 코트에 멋진 모자를 쓰고 화장도 짙게 한 차림새가 본당 신자는 아니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 같았습니다.

 ‘혹시 할머니와 5년 동안 소식 없이 지냈다는 며느리일까?’ 했던 짐작은 틀리지 않았어요. 학생들이 돌아간 뒤 저와 마주앉은 그 며느님은 시어머니께 전화를 받던 날 소스라치게 놀랐다면서 이야기 시작부터 눈물을 비쳤습니다.

“처음에는 좀 마음이 무거웠어도 연락 없이 지내는 햇수가 쌓여가면서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냈어요. 명절이나 연말이 다가오면 찜찜하기는 해도 제가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으니까요.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나다.’ 하는데 시어머님 목소리였지요. 갑작스런 전화에 깜짝 놀라 ‘어머나!’ 하는 순간 전화는 뚝 끊어지고요. ‘무슨 일이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두근두근 하는데 …어쨌든 통화를 해봐야겠기에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지요. 다급하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이번에는 또 ‘일은 무슨 일! 숙제하느라고.’ 소리치더니 다시 뚝 끊으시고요. 얼마나 황망한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소파에 앉은 채 한참 동안 덜덜 떨었어요.”

소파에서 덜덜 떨다가 좀 진정이 되고 나자 며느님 마음속에서 무언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대요. 그 다음 며칠 동안 내내 망설였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를 찾아뵐까 말까. 가면 무슨 말을 건넬까, 어떤 선물을 사나….

어느 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댁으로 향했답니다. 시어머니도 자신을 보고 무척 놀라시는 듯했다고요. 첫날엔 “가!”라고 소리를 질러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왔고요.

며칠 뒤 다시 시댁을 가서 여기저기 집 안 정리를 하다 보니 안방에 색연필이랑 성경책이 있어서 성경공부를 하시나 보다고 짐작했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무슨 학교를 다니시냐고 물었더니 아주 반색을 하면서 책가방을 가져오시더래요. 교재를 꺼내 한 장 두 장 책을 넘겨 보여주며 뭐라 뭐라 설명을 하시더랍니다. 색칠하는 것도 직접 보여주시고요.

“어머님은 열심히 설명을 하셔도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신이 나서 밝고 높은 목소리로 설명하시는 어머니가 어느 순간 마치 천사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런 느낌은 평생 처음이었어요. 색칠하기를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 요즘 새로 나온 고급 색연필을 사다 드렸지요.”

… 고부간이 5년이나 왕래를 끊고 살았을 정도라면 얼마나 큰 상처가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며느리한테 전화를 걸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할머니는 얼마나 부담스러우셨을까요? 애써 잊고 지냈던 며느리가 새삼스레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럴수록 더 얄미워져서 ‘숙제? 그까짓 거 안 하면 그만이지 뭐’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숙제를 하셨어요.

‘나도 예쁘지만 너도 예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나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고귀한 존재다.’

수업 중에 들은 말이 떠오르면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아픈 상처, 며느리와 아들이 생각나 할머니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흔들리는 그 마음이 할머니의 몸도 전화기를 향해 움직이도록 했겠지요?

 

                                                                                                         (「나도 예쁘고 너도 예쁘다」 42-47쪽)

 

- 유 글라라 수녀

* 유 글라라 수녀님 블로그 '바람 좋은 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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